“학생들의 옳은 일 말릴 수 없다” 만세운동 함께한 이화학당 교사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2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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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이화여대
3월 15일 ‘3·1운동 100주년’ 학술대회… 알려지지 않은 여성독립운동가 조명

이화학당 전경.
이화학당 전경.
이화여대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3월 15일 ‘3·1운동, 여성 그리고 이화’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여성적 관점’에서 독립운동을 살펴보는 행사로 특히,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를 조명하고 이화의 의미를 새기는 뜻깊은 시간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날 행사에서 감신대 이덕주 교수는 ‘3·1운동과 이화학당’이라는 주제로 발표할 예정이며 일제강점기 국내 여성항일운동사 연구, 일제강점기 국외 한인여성들의 항일운동 연구 현황과 과제 등을 주제로 전문가들의 발표와 토론이 있을 예정이다. 이날 발표자인 이덕주 교수의 ‘이화학당과 3·1운동’ 원고의 일부를 발췌하고 요약하여 독립만세운동 시기 이화학당의 모습과 알려지지 않은 이화학당 학생들의 독립을 위한 노력에 대해 알아본다.

1919년 3월 1일, 10여 명의 이화학당 학생들은 기숙사 담을 넘어 거리 시위에 참석하던 중 시위대를 이끌어 들여 이화학당 교내에 들어와 만세시위를 했다. 이러한 이화학당 교내시위는 이화 학생들에게 ‘독립운동 참여의지’를 강하게 심어주었고 그것은 3월 5일 만세시위 참여로 이어졌다. 돌발적인 3·1운동과는 달리 민족대표들과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 등의 학생대표들은 제2차 만세시위를 준비했으며, 3월 5일 서울시내 모든 학교가 휴업을 선언하고 오전 9시에 남대문역(서울역)에 집결하여 학생연합 만세시위를 시작하기로 하고 학교별로 담당할 시위 구역과 행진방향을 정했다.

추후 이화학당 학생들의 독립운동은 이화학당 휴교 후에도 전국 방방곡곡으로 흩어져 계속된다. 이처럼 그 당시 여성, 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는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심어주고, ‘근대 여성교육’과 ‘양성평등’의 가르침을 준 이화학당의 교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한 김독실 교사

이화학당 중학과 제1회 졸업생.
이화학당 중학과 제1회 졸업생.
이러한 학생연합 만세시위에 대한 정보는 이화학당에도 전달되었고, 특히 이화학당에서는 교사들이 그 정보를 학생들에게 전달하였다. “남학생들이 주도할 것으로 보이는 3월 5일 학생연합 만세시위에 여학교에서도 참여하되 참가여부는 개인의 자유에 맡기기로 한다”고 결의한 후 3월 5일 당일 아침 기숙사 식당에 모인 학생들에게 알렸다. 이화학당 교사들은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대표적 인물은 김독실이다.

김독실은 경성지방법원 공판에서 판사가 “학교 교원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인데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나는 학생들에게 정치를 고취한 일이 없고, 이번 일은 개인적인 마음으로 참석해 만세를 불렀다”고 대답하며 학생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개인 참여임을 당당히 밝혔다.

교사들의 독립운동 회의장소 된 이화학당 기숙사

이화학당 대학과 제2회 졸업식.
이화학당 대학과 제2회 졸업식.
이처럼 이화학당 학생들이 교내 만세시위와 학생연합시위에 참여한 뒤 체포돼 옥고를 치르는 동안, 교사들도 학생 못지않은 관심과 열정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김독실 교사처럼 학생들과 함께 거리에서 만세를 부른 교사도 있었지만, 많은 교사는 ‘독립선언’ 이후를 내다보며 보다 체계적이고 항구적인 민족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항일민족운동단체 조직운동에 참여했다. 이화학당 교사 박인덕과 신준려가 그 주역이었고 이화학당 기숙사에 있는 이들의 숙소가 그 비밀모임의 현장이 되었다.

1919년 3월 2일 오후,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화학당 회합이 이루어졌다. 정동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한 후, 자연스럽게 인근 이화학당으로 가서 기숙사 안에 있던 교사 박인덕의 방에서 모임을 가졌다. 이날 박인덕의 방에서는 남성 독립운동단체와 연대해 독립운동을 전개할 여성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는 문제, 조직 활동을 위한 자금을 모금하는 문제, 조직의 회장과 회계 등 임원을 선출하는 문제, 3월 4일 다시 이화학당에 모여 구체적으로 논의할 것 등 의견을 모았다. 그렇게 3월 2일 이화학당 1차 회합은 끝이 났다.

이화학당 독립운동 이끈 박인덕 교사


이화학당 중학과와 대학과 학생들.
이화학당 중학과와 대학과 학생들.
3월 4일 오후에 이화학당에서 2차 회합이 이루어졌다. 회합 장소는 이화학당 기숙사 안의 병실이었다. 이날 회합에는 이화학당의 김마리아와 황애덕, 박인덕, 신준려, 박승일이 참석했고 여기에 김마리아의 추천으로 정신여학교 대표 이성광과 채주복이 참석했다. 나혜석의 추천으로 진명여학교 대표 2명도 참석했다. 결과적으로 이화학당과 정신여학교, 진명여학교 등 서울시내 사립여학교 대표자 회합처럼 되었다. 이날은 3월 5일로 예정된 학생연합 만세시위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었다.

2일과 4일 양일간에 거쳐 교사들은 모임을 갖고, 여성 독립운동단체 결성과 여성대표 파리회의 파견 및 해외 독립운동단체 지원을 위한 자금모금에 대한 회의를 했다. 일본 경찰은 여러 취조과정에서 3월 2일과 3월 4일 이화학당 회합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였고 3월 10일 이화학당에서 수업을 하고 있던 신준려와 박인덕을 체포하였다. 그 당시 박인덕의 나이 22세, 신준려의 나이 24세였다.

3월 10일, 학교에서 수업을 하다 경찰서로 연행된 박인덕의 증언이다.

“교장실에서 나를 부른다는 연락이 왔다. 교장실에 가 보니 나를 경찰서로 데려갈 경찰 두 명이 와 있었는데 한 명은 일본인, 한 명은 한국인이었다. 그들은 나를 포승줄로 묶고 그 끝을 손에 잡고 경찰서까지 데리고 갔다.” 그렇게 박인덕은 동료 교사들과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포승줄에 묶여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유치장에 들어서자 험상궂게 생긴 남자들이 여러 감방들 앞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나를 그 감방 가운데 한 곳으로 밀쳐 넣었다. 감방에 들어가니 내가 아는 한 학생이 방금 취조실에서 고문을 당한 뒤 난 상처에서 피를 흘리며 돌아와 있었다. 내 차례가 되자 리본과 머리핀, 그리고 자해하거나 자살하는 데 도구로 쓰일 만한 모든 물품들을 입수한 후 취조실로 데리고 갔다. 취조실 벽에는 굵은 줄과 대나무 몽둥이, 가죽 채찍, 물 주전자 등 온갖 고문 도구들이 걸려 있었다. 나는 긴 의자에 앉았고 취조관 옆에 건장한 사내 셋이 대기하고 있었다.”

고문 형사들이 대기하고 있는 상태에서 박인덕에 대한 취조가 시작되었다. 취조관은 우선 이화 학생들의 만세시위에 대한 책임을 그에게 물었다. 취조관이 “네가 가르치던 학생들이 모두 독립 만세시위에 가담했으니 네 책임이다.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설명해보라”고 하자 박인덕은 “내가 그들의 선생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옳은 일에 참여한 것을 말릴 수는 없었다”고 대답하였다.

이화학당의 교사들 외에도 이화학당 출신의 황애덕, 김마리아 등이 3월 2일, 4일의 회의에 참석하여 독립운동을 논의하였으며, 결국 3월 6일 정신여학교 루이스 교장 사택에 은거해 있던 김마리아가 체포되고, 3월 18일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모금활동을 하던 황애덕은 동생의 집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이들은 출소 후 도피생활을 하며 ‘애국부인회’를 결성해 독립운동을 이어나갔으며 결국 김마리아와 황애덕은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김마리아는 망명하여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해나갔다.

이처럼 이화학당의 여성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다. 이 외에도 최매지, 손진실, 하란사, 신마실라, 이화숙, 하복순, 장필순, 손정순, 안숙자, 김백전, 김애은, 김복희, 권애라, 이애라, 오활론, 조신성, 임순남, 최문순 등 이화학당의 교사, 학생, 졸업생들은 체포되거나 희생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독립을 위해 싸웠으며 이러한 노력들은 상하이임시정부 수립까지 이어지게 된다.

김민식 기자 m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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