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발로 연기하던 ‘동물 전문 배우’, 연극계 블루칩으로 우뚝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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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가족’의 주인공 배우 이기돈
2006년 ‘이아고와 오셀로’로 데뷔, 검정개 역에 이어 뱀-새 역할 맡아
“몰락한 가족의 상처 그린 작품… 장남으로서 주인공 ‘종달’ 심정 이해”

강렬한 캐릭터를 자유자재로 연기하는 이기돈 배우는 멜로 연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는 “종달이 사랑을 고백하며 설레는 모습을 표현하는게 힘들어요. 때를 많이 탔나 봐요”라며 웃었다. 뒤로 연극 ‘가족’ 포토월 속 그의 모습이 보인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강렬한 캐릭터를 자유자재로 연기하는 이기돈 배우는 멜로 연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는 “종달이 사랑을 고백하며 설레는 모습을 표현하는게 힘들어요. 때를 많이 탔나 봐요”라며 웃었다. 뒤로 연극 ‘가족’ 포토월 속 그의 모습이 보인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검정개, 흰 구렁이, 새를 연기했던 동물 전문 배우가 ‘사람’으로 존재감을 빛내며 연극계의 ‘블루칩’이 됐다. 배우 이기돈(38)이다. 올해 1월 ‘리처드 3세’에서는 권력욕에 불타오르는 잔혹한 리처드 3세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악마적 본성을 지닌 스메르쟈코프 역을 맡아 소름끼치는 연기를 선보였다.

그는 21일 개막하는 연극 ‘가족’에서 주인공 종달 역을 맡아 아버지에게 억눌려 기를 펴지 못하고 분열되는 캐릭터를 실감나게 연기한다. 공연이 열리는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14일 그를 만났다.

“동물 전문 배우라는 말이 싫지 않아요. 뭐든 ‘전문’이라는 건 좋잖아요. 하하.”

연습실에서 봤던 종달의 불안한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연극영화과에서 연출을 전공한 그는 후배인 하지혜 배우의 추천으로 오디션에 응모해 2006년 ‘이아고와 오셀로’(한태숙 연출)에서 검정개 역으로 데뷔했다. 이를 위해 손에 장갑을 끼고 석촌호수 산책로를 아침마다 네 발로 뛰어다녔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의 흰 구렁이, ‘오장군의 발톱’에서 살인자 겸 개, ‘오이디푸스’의 새 등을 맡으며 강렬한 눈빛과 날랜 몸놀림으로 주목받았다. 대사를 조금씩 하게 됐고, 2011년 ‘주인이 오셨다’에서 주인공에 발탁됐다. 꾸준히 무대에 올랐지만 연기를 제대로 못한다는 자괴감에 연극을 접으려 했다.

“귀농해서 미니인삼을 키우려고 했어요. 4, 5주 만에 자라고 샐러드와 기내식에 많이 쓰인다더라고요.”

소식을 들은 이윤택 연출가는 “이 녀석,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대사를 주겠다”며 ‘길 떠나는 가족’(2014년)에서 열 개 이상의 역할을 하는 멀티맨을 시켰다.

“연극의 재미를 다시 느꼈어요. 가슴이 뜨거워졌죠. ‘리어왕’(2015년)의 광대 역은 정말 즐거웠어요. 매일 다른 동선으로 움직이며 에너지를 쏟아냈는데, 내게 이런 면이 있었나 싶더라고요.”

‘가족’은 자산가 기철(김정호)이 광복 후 정치에 뛰어들며 몰락하고, 가족들이 상처를 입는 과정을 그렸다. 장남인 종달은 강압적인 아버지 때문에 회피성 성격장애까지 갖게 되지만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종달을 이해해요. 저도 장남인 데다 어릴 적 아버지는 못하는 게 없는 완벽한 존재로 보였거든요. 외환위기로 아버지의 사업이 망해 형편이 어려워진 것도 비슷하고요.”

먹고사느라 3년간 옷, 액세서리 등을 파는 노점상을 하며 지쳐갈 즈음 만난 게 연극이었다. 그는 실험적인 작품을 비롯해 코믹 연기까지, 비중에 관계없이 새로운 역할에 도전하고 싶단다.

“단역을 할 때는 대사 욕심이 있었지만 지금은 안 그래요. 연극은 주연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요. 한태숙 선생님이 ‘검정개 한 번 더 할래?’ 하시면 망설이지 않고 ‘네!’라고 할 거예요.”(웃음) 21일∼5월 14일, 2만∼5만 원. 1644-2003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이기돈#연극 가족#동물 전문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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