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 기자의 무비홀릭]명대사 열전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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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션’의 한 장면.
영화 ‘마션’의 한 장면.
“엿 먹어라! 화성.”

화성에 홀로 남겨진 식물학자의 고군분투 생존기를 담은 영화 ‘마션’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 중 하나는 욕설이다. 이것은 단지 욕이 아니라 죽음에 저항하겠다는 존재 선언이다.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식물학자 마크(맷 데이먼)가 아니라 끝까지 삶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그의 긍정의 태도, 그 자체이다.

마크는 자기 똥을 양분 삼아 감자를 길러내는 등 과학 지식을 총동원해 화성에서 생존을 지속하면서 구조선을 기다리는데, 죽을 확률 99.99%인 상황에서도 “나는 화성에서 제일가는 식물학자야” “아, 나는 매일 화성의 멋진 지평선을 감상한다고!” “내가 지금부터 화성에서 하는 모든 행동은 사상 최초”라는 긍정의 주문을 스스로에게 미친놈처럼 거는 모습을 보다 보면, 절망을 씨앗 삼아 피어나는 유머란 이름의 꽃이야말로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키워낸 초강력 에너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록 스타가 되려는 어머니(메릴 스트립)의 인생 역정을 담은 영화 ‘어바웃 리키’도 고통 속에서 더욱 빛나는 유머와 긍정의 힘을 목격할 수 있는 영화. 바람난 남편에게 이혼당한 딸이 “내 심장이 썩어 문드러진다”며 소리치자, 어머니는 이런 기발하다 못해 엉뚱한 말로 딸을 위로하면서 염장을 지른다. “딸아, 심장은 스테이크처럼 썩는 게 아니야. ‘빅맥’처럼 점점 식더라도 절대로 썩진 않는다고!”

아, 이걸 긍정의 태도라고 봐야 하나, 아무 생각이 없다고 봐야 하나. 아니면 “돼야지(돼지) 코 푸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라는 김수미 주연의 ‘헬머니’ 속 명대사가 딱 어울릴 법한 상황이라고 해야 하나. 한술 더 뜨는 사례도 있다.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공룡들의 반란을 담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쥬라기 월드’. 부모가 이혼을 앞두고 있음을 눈치 챈 남동생이 “이젠 어떡해” 하며 울먹이자, 사춘기 형은 이런 방구 같은 말을 위로랍시고 내뱉는다. “엄마 아빠가 이혼하면 얼마나 좋은데. 선물도 엄마한테서 한 번 아빠한테서 또 한 번, 두 번이나 받잖아!”

할리우드 영화들 속 대사가 긍정의 에너지를 뿜어낸다면, 요즘 한국 영화들은 세상의 쓴맛을 알게 해주는 참신하고 우울한 대사로 가득하다. 우선 ‘N포 세대’(연예 결혼 출산 집 인간관계 꿈 등 모든 것을 포기한 신세대를 이르는 말)의 응어리진 내면을 거울처럼 비추는 컬트적인 저예산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열심히 살면 성공한다’고 순진하게 믿어 온 여주인공(이정현)은 결국 부조리한 현실의 벽에 좌절하면서 이런 쓸쓸한 대사를 던진다. “잠도 줄여가며 투 잡, 스리 잡 열심히 일했어요. 근데 아무리 꾸준히 일해도 집값은 더 꾸준히 오르더라고요.” 오, 이런. 김혜수의 연기가 빛나는 영화 ‘차이나타운’에도 비슷한 종류의 염세적 대화가 우리 가슴을 찢는다. “가난이 죄는 아니잖아요!” “아니. 그거 죄야.”

불공정과 반칙으로 얼룩지고 계급이 공고화된 우리 사회를 500% 드러내는 방법은 싸가지 없는 기득권 캐릭터들이 등장해 더욱 싸가지 없는 대사를 쏟아내도록 만드는 것일 터. 이선균 주연의 최신작 ‘성난 변호사’에서 뼛속부터 저질인 회장님(장현성)은 승소 확률 100%인 변호사 변호성(이선균)에게 이렇게 비아냥거린다.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건 (네가 아니라) 돈이야. 난 돈으로 너 같은 거 수백 명도 살 수 있으니까.” 결국 이 회장님에게 빌붙어 먹을 결심을 하게 된 주인공은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을 만한 이런 대사로 관객의 분노를 핵폭발시킨다. “세상은 원래 ×같은 거야. 바꾸려고 해도 바뀌질 않아. 이길 수 없다면 이기는 편에 서야 하는 거야.”

역시 돈 많은 나쁜 놈을 등장시켜 톡톡히 재미를 본 영화 ‘베테랑’에서 재벌 2세 조태오(유아인)의 대사도 관객의 치를 떨게 만드는 데 대성공한다. “맷돌 손잡이가 뭔지 알아요? ‘어이’라고 해요. 맷돌을 돌리려 하는데 어이가 딱 빠진 거야. 정말 웃기지 않아? 아무것도 아닌 이 맷돌 손잡이 때문에 내가 할 일을 못 하는 거지. 이걸 어이가 없다고 하는 거야. 지금 내 기분이 그래. 어이가 없네.”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이는 잘못된 대사다. 맷돌의 손잡이를 일컫는 단어로는 ‘어이’가 아니라 ‘어처구니’가 옳다. 시나리오를 쓴 류승완 감독은 잘못된 단어를 쓴 이유를 두고 언론에 “보일 듯 말 듯한 디테일”이라며 “조태오는 어이와 어처구니를 구분할 이유가 없는 친구다. 자기가 그렇게 말하면 끝까지 그게 맞는 것”이라는, 살짝 어처구니없는 답변을 하였다.

그렇다고 너무 열받지 마시길. 엄정화 주연의 ‘미쓰 와이프’에는 특히 우리 여성들의 막힌 속을 뻥 뚫어주는 이런 통쾌한 촌철살인도 등장하니 말이다. “여자한테 남자는 백해무익이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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