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호 어문기자의 말글 나들이]불편한 ‘개’의 전성시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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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호 어문기자
손진호 어문기자
‘개막장’ ‘개미남’, 얼마 전 종영한 TV 드라마에서 들은 말이다. 둘 다 부정적 이미지의 접두사 ‘개-’가 붙어있지만 의미는 영 딴판이다.

막장이 나쁜 뜻으로 널리 쓰이자 2009년 3월 당시 조관일 석탄공사 사장은 “막장은 30도를 오르내리는 고온을 잊은 채 땀 흘려 일하는 삶의 터전”이라고 했던 그곳이다. 그러나 요즘 언중은 ‘갈 데까지 갔다’는 부정적 의미로 주로 쓴다. 막장 드라마, 막장 집회, 막장 가족 등등…. 이런 ‘막장’에 ‘개’가 붙었으니 그 의미는 분명하다. 예전에 죄인의 목을 베는 ‘망나니’에 ‘개’를 붙여 ‘개망나니’로 부른 것처럼 부정에 부정의 의미를 더한 것이다.

문제는 ‘개미남’이다. 잘생긴 사람을 가리키는 미남에 개를 붙였다. 잘생긴 사람과 못생긴 사람 중 어느 쪽을 가리키는지 아리송하다. 열쇠는 젊은이들의 언어문화에 있다. 여기에서 ‘개’는 긍정을 강조한다. 즉 개미남은 미남 중의 미남을 가리킨다. ‘개이득(큰 이득을 봄)’ ‘개맛(아주 맛있다)’처럼 좋은 의미를 더욱 강조하는 쓰임새와 같다. 그렇지만 생소하고, 거부감이 든다.

예전부터 ‘개-’는 진짜나 좋은 것이 아니라는, 보잘것없다는 뜻으로 쓰였다. 개떡 개살구처럼 ‘야생상태’이거나 ‘질이 떨어지는’ 것을 나타낸다. 혹시 개떡을 ‘개가 먹는 떡’으로 아는 분은 없으신지. 개떡은 떡 중에서도 질이 나쁜 떡을 말한다. 오죽 맛이 없으면 떡에다 ‘개’를 붙였을까. ‘개떡 같다’ 역시 ‘형편없다 보잘것없다’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한다. 개떡과 달리 ‘찰떡’은 대접을 받는다. 많은 이들이 ‘정(情), 믿음, 관계 따위가 매우 긴밀하다’는 뜻으로 ‘찰떡같다’를 즐겨 쓴다. 이 표현은 어느새 한 단어로 굳어져 붙여 써야 한다.

개는 또 개꿈, 개죽음처럼 ‘헛됨’ ‘쓸데없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럼 개의 반대는? ‘참’이다. 참사랑 참뜻 등에는 ‘진실하고 올바르다’는 뜻이, 참기름 참나물 참조기 등에는 진짜배기라는 뜻이 담겨 있다. 참기름에도 가짜가 많다 보니 ‘순(純) 100% 진짜 참기름’이라는 웃지 못할 장문이 탄생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되는 게 언어라지만 젊은이들의 ‘의미 뒤집기’가 TV 드라마까지 점령해버린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판’이라고는 못하겠고 개탄만 할 뿐이다.

손진호 어문기자 songba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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