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고통 짊어지고 순교의 길 떠나시는 추기경에게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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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수정 추기경 바티칸서 서임식]

허영엽 신부·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국장 겸 대변인
허영엽 신부·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국장 겸 대변인
19일(한국 시간) 염수정 추기경의 서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탈리아 로마로 향했다. 2006년 정진석 추기경 서임식에도 참석했는데 또 한 분의 서임식을 보게 됐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서임식 이틀 전인 20일 추기경 회의가 열리고 있던 바오로 6세 홀에 갔다. 때마침 추기경들이 오전 회의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추기경들 사이로 흰 수단을 입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과 격의 없이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교황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눈빛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대화를 마친 교황께서 자신의 숙소인 마르타의 집 방향으로 혼자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시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황급히 경호원과 비서신부가 쫓아갔다.

그날 오후, 성 베드로 광장으로 나오다가 서울에서 온 선배 신부를 우연히 만났다. 그도 마르타의 집에 있는 여행자 숙소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그는 앉자마자 휴대전화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용한다는 6인용 식탁 사진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신학교에서 사용했던 여느 식탁처럼 소박했다. 그리고 다음 사진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고 있는 교황의 뒷모습이 찍힌 사진이었다. 사진 속 교황은 동네에서 흔히 보는 할아버지 같았다. 그 선배 신부는 처음 그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교황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사람들은 그분에게서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은 ‘희망’을 보고 싶어 한다고 했다. 그분을 멀리서나마 보고 있다는 것이 참 행복하게 느껴진다.

며칠 전 떠날 때 심했던 염 추기경의 감기는 여전했다. 20일 추기경 회의 참석을 앞두고 그는 약간 긴장한 듯 보였다. 염 추기경은 학술 발표나 세미나에 참석하면 인사말만 하고 자리를 떠나는 법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킨다. 그 인내심은 정말 흉내 내기 어렵다.

추기경 회의 둘째 날, 염 추기경은 발표 시간에 남북한의 이산가족 상봉을 소개하며 교황에게 남북한의 이산가족과 평화를 위한 기도를 부탁했다고 한다. 평양교구장 서리인 염 추기경은 사실 북한 교회에 관심이 많다. 지난해에는 개성공단 근로자들을 위한 성탄미사를 추진했으나 사정상 성사되지는 않았다. 추기경은 실제 인터넷으로 방북을 위한 교육까지 수료했다.

새로 선발된 추기경들의 복장은 온통 진홍색이다. 추기경의 붉은색은 순교자의 피를 상징한다. 추기경들은 앞장서 순교자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순교자의 삶은 증거의 삶이고 고통의 삶이다. 염 추기경은 자신의 주보성인인 안드레아 사도의 X자형 십자가를 사인으로 사용한다.

염 추기경은 어려운 일에 부닥치면 “내가 먼저 죽어야지…” 하며 혼잣말로 탄식하는 것을 나는 여러 번 들었다. 서임식 강론에서 교황이 이야기한 고통과 십자가의 길, 순교의 길은 염 추기경이 가야 할 길인 것이다.

―바티칸에서

허영엽 신부·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국장 겸 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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