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지시인선의 전통적인 캐리커처와 다른 스타일의 얼굴들. 왼쪽부터 한국화가 김선두의 컷이 실린 한강 시집 초판, 한강 시인의 동생이 캐리커처를 그린 같은 시집의 재판, 가수 요조가 그림을 그린 김소연 시집, 이성복 시인이 직접 그린 자화상을 실은 시집. 문학과지성사 제공
《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얼굴’이 달라졌다. 30년 넘게 지켜온 표지의 캐리커처에 다양한 스타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문학과지성사의 문지시인선은 고유의 표지 디자인을 고수해왔다. 1977년 첫 번째로 낸 황동규 시인의 시집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이후 표지의 글자체와 크기, 색깔에는 변화를 줬지만 시인의 캐리커처는 변치 않는 트레이드마크였다. 반면
문지시인선과 더불어 한국 현대시의 양대 산맥을 이뤄온 창비의 ‘창비시선’은 시인 얼굴 사진이나 풍경 사진, 그림 등으로 다채롭게 표지를 꾸며왔다. 》
그동안 문지시인선의 얼굴 캐리커처는 시인이자 화가인 이제하(77)와 김영태(1936∼2007)가 번갈아 그렸다. 이제하 시인은 “당시 일반 화가들에게 그려 달라고 하면 화료(畵料)를 엄청 달라고 하니까 미술대(홍익대) 나오고 문인들과 친했던 김영태와 내가 캐리커처를 그리게 된 것”이라고 했다. 김영태가 작고한 이후 이제하가 대부분 맡아 그렸으나 최근 새로운 분위기를 원하는 시인들의 요청이 잇따르면서 다른 스타일의 얼굴이 부쩍 많아졌다.
가장 최근에 나온 시집이 13일 출간된 442호(나희덕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인데, 300번대 후반부터 이병률 시집 등에 드문드문 다른 얼굴 컷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400번대에 들어서는 유종인 이이체 하재연 이성복 황병승 한강 김소연 곽효환 시집 표지에 다른 캐리커처가 찍혔다.
김소연 시인의 369호 시집 ‘눈물이라는 뼈’에서는 심보선 시인이, 437호 ‘수학자의 아침’에는 가수 요조가 시인의 얼굴 컷을 그렸다. 곽효환 시집 ‘슬픔의 뼈대’에 실린 캐리커처는 화가 이인이 맡았고, 황병승 시집 ‘육체쇼와 전집’에는 가수 겸 시인 성기완이 그린 컷이 실렸다.
“지난번 시집 ‘지도에 없는 집’(2010년) 이후 4년 만에 새 시집을 냈는데, 문지 측에서 5년이 지나야 새로 컷을 그린다고 하더라. 새 책에는 새로운 캐리커처를 쓰고 싶어서 친한 화가 이인에게 ‘우정출연’을 부탁했다.”(곽효환 시인)
문지시인선의 ‘오리지널’ 스타일. 이제하 시인이 캐리커처를 그린 김명인 시집. 문학과지성사 제공지난해 11월 출간된 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초판에는 한국화가 김선두가 그린 컷이 실렸으나 재판부터는 시인의 동생 한강은이 그린 새 캐리커처가 들어갔다.
“시로 등단한 이후 첫 시집이어서 친분 있는 분께서 그려주면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문지시인선의 특징이 캐리커처인데 초판에 실린 컷은 초상화 느낌이어서 잘 안 맞는다는 의견이 출판사와 독자들로부터 나왔다. 그래서 재판을 찍을 때 다른 그림으로 바꿨다.”(한강 시인)
이성복 시집 ‘래여애반다라’와 유종인 시집 ‘사랑이라는 재촉들’에는 시인 자신이 직접 그린 자화상이 찍혔다. 이성복 시인은 “이면지에 대충 그린 내 얼굴인데 반가사유상이 떠오르기도 하고 신라의 웃는 얼굴 무늬 기와와 비슷하기도 하더라”면서 “시집 제목인 ‘래여애반다라’(신라 향가의 한 구절)와 잘 어울리기에 이 그림을 쓰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그림을 출판사에 보내는 과정에서 스캐너 오작동으로 얼굴 그림이 반쪽만 나왔는데 그 느낌이 마음에 들어서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시인들은 시집 표지에도 좀 더 개성을 불어넣고 싶어 하지만, 시인이 원한다고 해서 모두 ‘정통 캐리커처’가 아닌 다른 컷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지 측은 “기존 문지시인선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시집 내용과 어울려야 승인을 해준다”고 했다. 한 시인은 “최근 문지시인선에 ‘외부 컷’이 크게 늘어나자 정체성이 흐트러질까 하는 출판사의 고민이 커보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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