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그곳을 다시 찾았다. 소리를 내지 못하는 아이들, 몸도 가누지 못하는 아이들이 그곳에 있었다. 어느 아이가 얼마나 오래 숨겨 두었던지 이미 새카매져 버린 바나나를 슬며시 건넸다. 시큼한 냄새를 삼키며 우걱우걱 바나나를 씹는 동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소리가 이 아이들을 노래하게, 그리고 살게 할 수 있겠구나. 그렇게 다시 시작됐다. 아이들의 삶도, 또 나의 삶도.
나락으로 떨어진 삶
어깨에 꽤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탈리아 밀라노시립학교 성악교수였고, 작지만 사업체도 하나 운영했다. 벤츠를 굴렸고, 수중엔 몇만 달러씩 넣고 다녔다. 30대 중반에 이쯤이면 성공한 삶이라 여겼다. 교만은 하늘을 찔렀다.
‘한여름 밤의 꿈’은 편지 한 통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1998년 초. 11세 터울의 막내 여동생이 “대학등록금을 좀 보내 달라”고 했다. 무슨 일이 있구나 싶었다. 부모님은 한사코 말렸지만, 열일을 제쳐두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집은 쑥대밭이 돼 있었다. 사업을 하던 남동생이 사기를 당해 집이 넘어갔다. 갈 곳이 없던 부모님과 여동생은 전기도 수도도 끊긴 5층짜리 주공아파트를 지키고 있었다. 방법이 없었다. 이탈리아로 돌아가 한 달 만에 모든 걸 정리한 뒤 귀국했다. 돌아오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다. 돈도 몇억 원은 있었다. 그런데 이리저리 급한 곳을 메우다 보니 이내 바닥을 드러냈다. 한 지인이 조건 없이 1000만 원을 빌려준 덕에 겨우 반지하방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비가 오면 물을 퍼내야 하는 집이었다. 남동생이 재기를 하겠다며 시작한 프랜차이즈 포장마차 사업(그마저도 2년 만에 망했다)을 도왔다. 한때 잘나가던 성악가는 그렇게 떡볶이와 핫도그를 만들며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우연일까 필연일까
1998년이 저물어가고 있을 때였다. 지치고 힘든 일상은 나아질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조금이나마 편안했던 기억을 찾고 싶어서였을까. 그날따라 여동생과 옛날 앨범을 뒤적였다. 여동생의 눈이 사진 한 장에 멈춰 섰다.
“큰오빠가 얘 사진을 왜 갖고 있어?”
혜경이었다. 꼭 14년 전, 그러니까 대학교 2학년 때 혜경이를 처음 만났다. 당시 8세이던 혜경이는 머리가 점점 커지는 희귀병인 ‘대두증’을 앓았다. 휠체어에 앉은 아이는 말을 들을 수도, 할 수도 없다고 했다. 머리에 고정용 핀을 박은 혜경이의 모습은 신학대에서 교회음악을 전공하는 독실한 신앙인의 눈에도 그저 ‘끔찍해’ 보일 뿐이었다. 그날 ‘후원결연’을 맺은 뒤 한 달에 5000원씩을 보냈다. 그러나 그 후 한 번도 혜경이를 보지 못했다. 졸업을 하고 1989년 말 유학을 떠나면서 혜경이는 자연스럽게 잊어졌다. 사회복지과를 졸업하고 홀트일산복지타운에서 일을 시작한 여동생이 그런 혜경이의 사진을 알아본 것이었다. 12세를 넘기기 힘들다던 아이는 놀랍게도 스무 살이 넘도록 살아있다고 했다. 그때 또 하나를 알게 됐다. 아버지가 나를 대신해 혜경이에 대한 후원을 이어오고 있었다는 걸.
여동생과 함께 당장 홀트타운을 찾았다. 혜경이는 그대로였다. 처음 혜경이를 만났을 땐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청춘이었다. 14년 만에 아이를 다시 찾은 나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매우 지쳐 있었다. “혜경아” 하는 부름에 아이는 역시 반응이 없었다. 홀트타운 식구들과 혜경이와의 인연을 얘기하고 있을 때 한 아이가 까만 바나나를 건넸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에게 ‘먹을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에, 상한 음식인 걸 알면서도 “고맙다”며 먹어야 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내가 여기 다시 오게 된 것도 보통 인연은 아니니, 나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 있으면 기꺼이 하겠노라고. 그런 마음 때문인지, 시큼한 냄새 때문인지 코끝이 찡해졌다.
노래하는 지휘자
합창단원들은 맑았다. 음악을 몰랐고 노랫말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누구보다 순수했다. 그런데 노래를 먼저 불러주지 않으면 아무도 소리를 내려 하지 않았다. 지휘자가 목이 아플 때까지 노래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이르러서도 후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사실 합창단은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인생의 탈출구이기도 했다. 음악의 길을 다시 찾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합창단 덕분이었다. 혜경이는 다시 만난 지 2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훨씬 질기고 긴 인연을 선물로 남겨둔 채. 합창단이 만들어진 1999년 여름. 연습 시간에 맞춰 찾아간 홀트타운 내 교회에서 한 아이가 두 팔을 벌리고 입구를 막아섰다. 뭔가 수작을 부리고 있구나 싶었지만 모른 체했다. 아니나 다를까. 불을 끄고 커튼까지 쳐놓은 깜깜한 강당에서 아이들이 큼지막한 케이크에 불을 붙였다. 나지막이 들려오는 불협화음들.
“때로는 너의 앞에 어려움과 아픔 있지만∼.”
지휘자 선생님의 생일날이라며 아이들은 ‘축복송’을 불렀다. 노래하는 아이들 앞에서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한 명 한 명 눈을 쳐다보며 약속했다. 내가 살아 숨쉬는 한 너희들과 함께하겠다고.
지휘자 박제응(48)은 마흔셋 되던 2007년 늦은 결혼을 한 뒤 딸 은유(4)와 아들 유상이(1)를 키우며 행복을 만끽하는 중이다. 무엇보다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어쩌면 영영 놓칠 뻔했던 음악활동을 왕성히 하고 있다. 결혼 직후엔 전세로, 최근엔 새 아파트로 이사도 했다. 그는 늘 “이들과 함께 노래하면서 나도 내 자리를 찾았다”고 말한다. 10년째 이어지고 있는 JW중외그룹의 후원에 힘입어 합창단도 나름 활발한 공연활동을 펼치고 있다. 아픈 사람과 아프지 않은 사람 모두에게 감동을 주는 그런 공연을 말이다. ▶ [채널A 영상] 눈 대신 마음으로…시각장애인 예술단 ‘관현맹인’ 첫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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