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정경화는 건재했고 정명훈은 날개 달아

  • 동아일보

◇ 서울시향 신년음악회 ★★★★

2010년, 부상 후 첫 복귀 무대를 준비하면서 정경화는 “(정)명훈이와 서울시향과 연주하고 싶다”고 했다. 5일 서울 세종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서울시립교향악단 신년 음악회로 그 바람이 이뤄졌다. 정명훈과는 2000년 산타체칠리아 오케스트라 이후 12년, 서울시향과는 1974년 샤를 뒤투아와 함께한 지 38년 만의 협연이다. 레퍼토리는 브루흐 ‘스코틀랜드 환상곡’이었다. 루돌프 켐페 지휘, 로열필하모닉과의 데카 녹음으로 친숙한 곡이지만 세계 데뷔 이후 고국에서 이 곡을 연주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뒤투아와 브루흐 협주곡 1번, 1992년 정명훈과 브루흐 협주곡 2번에 이어 그의 나이 예순넷에 브루흐 바이올린 3부작 국내 공연을 완성하게 됐다.

위엄 있는 관악의 울림 속에 카푸치노에 살짝 거품이 얹히듯 정경화의 유연하고 로맨틱한 바이올린 솔로가 시작됐다. 눈부신 기교는 없었지만 하이페츠, 그뤼미오의 해석처럼 리듬감을 강조하고 열정적으로 노래하는 모습은 젊은 시절 그대로였다. 독주부에선 세세한 소릿결에 집중하기보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 연주하는 자세가 뚜렷했다. 자유자재로 템포를 조절하며 브루흐가 남긴 풍부한 정서를 천변만화의 얼굴 표정으로도 시각화했다.

곡이 흥취를 더해가자 그의 몸에 배어 있던 트리플 스토핑(세 현을 동시에 울리는 것) 같은 고난도의 기교가 하나씩 튀어나왔다. 유명한 작품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특별하게 전하는 정경화만의 방식이 후반부에 열정적으로 그려졌다. 음악적 신념에 따라 가감 없이 자신의 모습을 마음껏 펼쳐 보이는 ‘정경화 인생 3막’이 지난해 12월 리사이틀 무대에 이어 재현됐다. 세련되고 밝은 색채로 솔로 바이올린의 매력을 극대화하는 정명훈과 서울시향의 반주는 헌신에 가까웠다.

이어 연주된 말러 교향곡 1번에서 2년간의 말러 사이클을 완성하고 궤도에 오른 서울시향의 경쾌한 탄력이 유감없이 드러났다. 템포의 대비나 잦은 루바토(박자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하는 연주법이나 창법)가 없어도 세부적인 표현과 클라이맥스의 설정 모두 유럽 일류 오케스트라의 음반에서 듣던 자유분방함이 가득했다. 정명훈의 에너지는 마지막 악장까지 숨고를 틈 없이 폭우처럼 쏟아졌다. 금관이 포효하고 목관이 요동쳤다. 강렬한 포르티시모로 관객을 뻐근하게 하는 서울시향의 현재 테크닉은 정명훈이 예술고문으로 재직하는 도쿄필하모닉의 말러를 무색하게 한다. 2006년 베토벤 사이클을 통해 우리가 알아야 할 교향곡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했던 정명훈은 이제 한국 오케스트라라는 선입견을 완전히 넘은 고품격 말러를 선사하고 있다.

한정호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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