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처럼 흔들리던 삶… 이제 詩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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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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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간 20돌 장애인 문학지 ‘솟대문학’서 활약 김길 시인

올해 창간 20주년을 맞는 장애인 문학 계간지 ‘솟대문학’.
올해 창간 20주년을 맞는 장애인 문학 계간지 ‘솟대문학’.
국내 유일의 장애인 문학 계간지 ‘솟대문학’이 올해 창간 20주년을 맞는다. 7월 7일 서울 공군회관에서 열리는 20주년 행사에는 역대 ‘구상솟대문학상’ 본상 수상자들도 참석할 예정이다. 1996년부터 솟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장애 시인 가운데 매년 1명을 뽑아 수여해 온 상이다. 편집자 겸 발행인 방귀희 씨와 문학평론가 김재홍 경희대 교수는 역대 수상자 14명 중 ‘최고의 시인’으로 2009년 본상 수상자인 김길 씨(52)를 추천했다. 김 교수는 “시 ‘흔들림에 대하여’는 중심을 잡지 못하는 세상에서 생명의 존재 확인과 살아보려는 주체성으로 존재의 초월과 상승을 획득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 20년을 돌아온 시인의 꿈

‘순간순간마다 사람들은 풀꽃처럼/흔들립니다./발자국에 묻어나는 쓸쓸함에도/덧없이 흔들립니다.’

하얀 도화지에 큰 글자로 시를 쓰는 김길 시인이 보는 세상은 늘 눈부시게 하얗다. 시인의 서재엔 음성 녹음 도서들이 진열돼 있다. 김진 기자 holyjjin@donga.com
하얀 도화지에 큰 글자로 시를 쓰는 김길 시인이 보는 세상은 늘 눈부시게 하얗다. 시인의 서재엔 음성 녹음 도서들이 진열돼 있다. 김진 기자 holyjjin@donga.com
앞이 보이지 않는 시인은 가슴에 쓴 시구(詩句)를 읽는다. 허공을 응시하던 눈동자가 자작시 ‘흔들림에 대하여’를 낭독할 때는 흔들리지 않고 또렷했다. 4일 이른 아침 시인의 집을 방문했다. 녹음도서가 꽂혀 있는 시인의 서재. 자원봉사자들이 서툴게 녹음한 문학작품들이 카세트테이프에 정성스레 담겨 있었다.

흔들리는 풀꽃처럼 시인의 삶은 흔들렸다. 고교시절 백석의 시집을 들고 다니며 시인을 꿈꾸던 문학소년은 어느 날 갑자기 눈앞을 가린 하얀 안개 때문에 꿈을 포기했다. 망막색소변성증, 눈동자로 바라본 세상이 눈 속 까만 종이에 맺히지 않았다. 소년은 손때가 묻어 너덜해진 백석의 시집을 더는 넘기지 않았다.

22년이 지났다. 이삿짐 나르는 일, 각종 판매원 일을 헤매다 흐릿한 눈 때문에 번번이 좌절했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생긴 그는 전단도 돌리고 교복집 볼펜도 돌렸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이 자꾸만 흐려져 넘어지고 다친 상처로 다리의 흉터가 아물 날이 없었다.

‘강은 무수한 소리의 흔들림/…/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돌들도/있어야 할 곳을 찾아 제 몸 뒤척이듯.’

그런 그에게 다시 시가 찾아왔다. 눈 대신 귀로 시를 읽었다. 복지관에서 녹음한 음성도서로 시를 읽고 문학을 공부했다. 복지관 문학창작교실 강의를 맡은 국문학 교수들도 그의 열정에 감동했다. 4년을 배우며 끊임없이 시를 썼다.

솟대문학이 2003년 가을호부터 그의 시를 싣기 시작했다. 하얀 도화지에 큰 매직으로 쓴 시는 실로암문학상, 안문희문학상, 청민문학상에서 모두 대상을 받았다.

○ “솟대문학은 세상 향한 문”

솟대문학은 고(故) 구상 시인이 기탁한 2억 원으로 1991년 창간됐다. 장애 문인들의 문학작품을 심사해 게재하고 창작활동을 지원한다. 그러나 일상에서의 차별이라는 벽을 넘어서야 하는 장애 문인들이 문학활동을 지속하기는 쉽지 않다.

창간 당시부터 편집자 겸 발행인인 방 씨도 1급 지체장애인이다. 휠체어를 탄 그는 동국대를 수석 졸업했고 KBS 제3라디오 프로그램 ‘내일은 푸른 하늘’의 작가로 활동 중이다. 김 씨도 20여 년을 돌아 왔다. “문이란 어쩌면 돌아오기 위해 있는지도 모릅니다. 솟대문학은 제가 시의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문이었습니다.”

‘지우고 비워야 가벼워지는 세상에서/지극히 작은 돌 같은 나로 인하여/흔들릴 세상을 바라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그는 오늘도 가슴에 쓴 시구를 읽는다. 풀꽃처럼 흔들렸던 시인은 이제 흔들리지 않는다. 시인도, 솟대문학도 이제는 ‘나로 인해 흔들릴 세상’을 꿈꾼다.

김진 기자 holyjj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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