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 한줄]소설 ‘새벽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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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4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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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냄, 갈등, 적의를 누그러뜨리는 유머의 위대함

《 “진정으로 적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순간들, 그 순간들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유머 덕분이었다. …유머는 존엄성의 선언이요, 자기에게 닥친 일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의 확인이다”
― 소설 ‘새벽의 약속’(로맹 가리 지음) 중에서

칙릿(Chick-lit·젊은 여성 독자를 겨냥한 소설)의 고전인 ‘브리짓 존스의 일기’엔 이런 장면이 나온다. 리포터로 첫 생방송에 나선 브리짓이 긴급 출동하는 소방대원을 따라 봉을 타고 내려온다. 현장의 급박함을 생생히 전달하겠다는 의욕에서다. 하지만 그녀의 미니스커트는 점점 말려 올라가고 외마디 비명과 함께 엉덩이가 카메라 렌즈에 부딪히며 방송이 끝난다. 브리짓이 방송사고 장면을 반복해 모니터하며 ‘브라질만 한 엉덩이’가 전국에 생중계된 데 미칠 듯 괴로워한 건 당연한 일이다.

때때로 우리에겐 자괴의 순간들이 찾아온다. 요즘 같은 땐 면접관 앞에서 내뱉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답변이 불합격 통지를 받은 후에도 계속 떠올라 벽에 머리를 찧고픈 구직자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시작은 호기롭게 했으나 ‘그 애’ 앞에서 장렬히 전사하고 쿰쿰한 자취방에 내동댕이쳐지는 굴욕은 자기 주량을 깨닫지 못한 대학 신입생들만 겪는 일이 아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은 회식자리에서 과음으로 조증 상태에 돌입하면 동료뿐 아니라 상사에게도 할 말 못할 말, 보일 꼴 못 보일 꼴에 대한 분별이 사라진다. 다음날 숙취와 함께 간밤 ‘진상’ 행각이 어렴풋이 떠오르면, 깊은 자기혐오의 시간이 찾아온다.

생의 좌충우돌은 로맨틱 코미디나 시트콤에서 볼 수 있는 사건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주변엔 시트콤적인 일화가 넘친다. 어떤 이들은 사교모임에서 ‘어쿠스틱보단 통기타가 좋다’(어쿠스틱이나 통기타나 같은 말이다)거나 ‘베라왕이 어느 나라 왕 이름이냐’(드레스로 유명한 디자이너 이름이다)고 묻다 사교적 치명타를 입는다. 다른 이들은 상사 욕으로 도배한 문자메시지를 실수로 상사에게 전송하거나, 괴롭혔던 후임병을 거래처 사장 아들로 만나 진퇴양난에 빠진다. 가벼운 굴욕에서 자못 심각한 상황까지, 본질은 같다. 그럴듯하게 보이고 싶은 욕심, 잘해보려는 의욕, 성공하고 싶은 갈망의 근원적 좌절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자학 없이 견디기 힘든 이런 일들이 시트콤에선 웃음 한 방으로 해결된다. 결혼 서약에서 신부 대신 옛 애인 이름을 불러 파혼당하고(‘프렌즈’), 상사 뒤통수를 치려다 들통 나 눈물 콧물에 무릎 꿇고 비는 굴욕을 겪고(‘오피스’), 야심 차게 회사 개혁안을 제시했다 바로 해고되는 좌절을 맛봐도(영화 ‘제리 맥과이어’), 그것은 유머의 질료가 될 뿐이다. 현실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좌절이지만 시트콤에서는 삶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윤활유, 바닥을 친 공을 튀어 오르게 하는 탄성, 더 높이 뛸 수 있는 디딤판일 뿐이기 때문이다. 주목할 점은 이 ‘유머를 통한 승화’야말로 역사상 숱한 문인들이 걸작으로 일러준 ‘삶의 난관에 대처하는 방식’과 같다는 것이다.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실수와 불행에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유머라는 프리즘을 대면 상황은 정반대로 바뀐다. 그 황홀한 관조 속에 생을 관통하는 통찰이 숨어 있다고, 로맹 가리도 말하고 있다.

그러니 긴장해 망쳐버린 프레젠테이션, 다시금 찾아온 거절과 불합격의 고통 따위가 대수인가. 그것들은 삶을 통째로 흔들 만한 가치가 없다. 저들이 웃으며 박수치도록 내버려두자. 그리고 우리도 웃자. 러닝타임은 한참 남았다. ‘굴욕은 짧고 인생은 길다’는 도저한 낙관. 삶을 성가시게 하는 실패와 좌절, 오만하게 달려드는 저 적들을 가뿐히 뛰어넘는 내 인생의 진정한 우월성이 확인되는 지점은 바로 그곳이다.

appena@naver.com

톨이 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Humor, Fantasy, Humanism을 모토로 사는 낭만주의자. 서사적인 동시에 서정적인 부류. 불안정한 모험과 지루한 안정감 사이에서 줄다리기 중인 말기 이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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