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시를 그리고… 그림을 읊어… 마음을 채우다

  • 동아일보

◇그림, 문학에 취하다
고연희 지음/365쪽·2만 원·아트북스

《 여기 산수화 한 점이 있다.
배경에는 산, 화폭 아래쪽 물가에는 초가지붕을 인 정자가 서 있다. 중앙에 선 나무는 잎이 무성하다. 저자에 따르면 ‘소탈한 붓질로 습작처럼 그려낸 한 점의 문인화 소품’이다. 얼핏 평범해 보이는 이 그림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화가가 적은 글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적은 이는 조선 후기 문인화가인 허필. 그는 “두보의 ‘봄날 꾀꼬리 대나무 숲에서 울고, 신선집의 개 구름 사이에서 짖는다’라는 시구를 읽고 음미하다 초선(허필)이 장난 삼아 화첩에 그리노라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떨려오더라”라고 썼다. 》
글귀에 나오는 시구 ‘봄날 꾀꼬리…’는 두보의 시 ‘등왕정자(등王亭子)’ 중 한 구절이다. 시가 묘사하는 정경과 달리 그림에는 대나무 숲은커녕 개 한 마리도 등장하지 않는다.

의문은 두보의 시 전체를 읽어야 풀린다. 제목의 ‘등왕’은 당나라 태종의 동생으로 한때 술과 가무를 즐기며 호화롭게 놀았던 인물이다. 두보는 시 첫 구절에서 ‘군왕의 정자가 파산(巴山)을 베고 있으니/만장의 붉은 계단 우러러 오를 만하구나’라고 등왕이 머물렀던 정자 터를 묘사한다. 그 뒤에 등장하는 꾀꼬리 우는 대나무 숲과 신선집은 한나라에서 높은 권력을 누렸던 두 인물, 양효왕과 희남왕의 한창 시절을 의미한다.

이 세 사람은 모두 한때 높은 권력을 누리며 신선놀음을 했지만 그 때문에 백성의 원성을 사거나 모함을 받고 몰락했다. 허필의 그림이 표현한 것은 한때의 향락 뒤 고통과 쓸쓸함, 역사의 굴곡이었던 것이다.

옛 그림은 늘 문학작품과 쌍을 이룬다. 그림 속 글귀가 어떤 의미인지 알면 평범한 그림이라도 새로운 뜻이 생기고, 공인받는 명품이라면 한층 심오한 뜻을 깨칠 수 있다. 국문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한 저자는 옛 그림 속 문학작품을 알기 쉽게 해설하며 그림과 글 모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로 독자를 이끈다.

그림 속에 아예 유명한 시인이 등장하기도 한다. 도연명의 시를 표현한 정선의 부채그림 두 폭이 그 예다. 도연명의 ‘음주(飮酒)’ 중 한 구절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를 따다가(採菊東籬下·채국동리하)/그윽이 남산을 보노라(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를 표현했다.

문학을 통하면 옛 그림이 보인다. 정선은 도연명의 시 ‘음주(飮酒)’ 중 ‘그윽이 남산을 보노라’라는 구절에 취해 부채그림을 그렸다.
문학을 통하면 옛 그림이 보인다. 정선은 도연명의 시 ‘음주(飮酒)’ 중 ‘그윽이 남산을 보노라’라는 구절에 취해 부채그림을 그렸다.
도연명은 마흔한 살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술에 취해 사는 것이 오히려 옳은 일이라는 뜻을 담아 ‘음주’를 지었다. ‘동쪽 울타리 아래…’는 전체 시 중에서도 경지에 다다른 시인을 묘사한 절창으로 꼽힌다.

‘채국동리하’를 묘사한 첫 그림에서 도연명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모습이다. 주변에는 그가 꺾었을 국화꽃이 널브러져 있고, 술동이와 사발이 나뒹굴고 있다. 화사한 노란색 국화가 인상적이다. 그 다음 ‘유연견남산’을 표현한 그림은 흑백의 수묵화로 더욱 엄정한 분위기다. 손에는 국화 한 송이를 고쳐 쥐고 허리를 곧추세운 채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 두 폭의 대비가 절묘하게 시의 의미를 전달한다.

조선 후기 강세황의 ‘지상편도(池上篇圖)’는 수천 년 전 백거이의 ‘지상편(池上篇·못가에서 쓰다)’을 묘사한 그림으로 당대 문인들의 꿈을 엿볼 수 있다. ‘지상편’ 서문에서 백거이는 열일곱 마지기 땅에 3분의 1은 집을 짓고, 5분의 1은 연못을 파고, 9분의 1은 대나무를 심었다고 노래한다. 학과 괴암, 흰 연꽃을 배치해 꾸미기도 했다. 그는 평생을 들여 꾸민 이 정원에서 늙어가리라고 노래한다.

도시문화가 발달하며 정원과 관상용 화훼에 대한 관심이 늘어가던 조선 후기, ‘지상편’은 문인들이 꿈꾸는 정원의 전범이었다. 강세황은 집과 뜰, 다리, 배, 책, 술, 노래 등 ‘지상편’에 등장하는 요소를 세밀히 화폭에 담았다. 이 그림은 처남 유경종을 위해 그린 것이었다. 유경종은 그림 제목 왼편의 발문에서 “이 두루마리는 구성이 매우 좋고 필치의 기세도 빼어나게 자유로우니, 실로 낙천선생(백거이)의 인품과 낙천선생의 시문에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라고 적었다.

평범한 산수화로 보이는 허필의 ‘두보시의도(杜甫詩意圖)’는 그가 영감을 받은 두보의 시 ‘등왕정자’를 이해할 때 그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다. 사진 제공 아트북스
평범한 산수화로 보이는 허필의 ‘두보시의도(杜甫詩意圖)’는 그가 영감을 받은 두보의 시 ‘등왕정자’를 이해할 때 그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다. 사진 제공 아트북스
자신의 심경을 그림 안에 오롯이 담고 또 그 뜻을 글로 펼쳐놓은 그림도 있다. 추사 김정희의 걸작 ‘불이선란(不二禪蘭)’이 대표적이다. 비스듬히 비껴 오른, 특유의 글씨체를 연상시키는 난 옆으로 시문 하나가 적혀 있다.

‘난을 그리지 않은 지 스무 해,/우연히 성(性) 가운데 천(天)을 쳐서 내노라/문을 닫고 찾고 찾은 곳,/이것이 유마거사의 불이선(不二禪)이로다.’

둘째 구절의 ‘성중천(性中天)’은 김정희가 흠모했던 청나라 예술가 정섭의 예술사상을 표현한 말이다. 정섭은 실내에서 기르는 난 대신 토양과 바위를 배경으로 엉키듯 피어나는 난을 그려 자연이 부여한 난의 천성을 온전히 담아내기를 즐겼다. ‘불이선란’에서 난은 바람이라도 부는 듯 한쪽으로 휘어져 있다. 김정희 역시 ‘천성에 부합하고 본성을 온전히 하는’ 난의 꿋꿋하고 자유로운 정신을 담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셋째 구절의 ‘불이선’은 불교에서 나뉘지 않는 참된 존재, 세상의 모든 경계와 존재를 초월한 경지를 표현한 단어다. 김정희는 이 구절을 통해 자신의 난초 그림이 말을 잊은 지극한 경지를 담고자 한다는 것을 표현한 셈이다. 유배지에서의 비통함이 묻어나는 ‘세한도’와 달리 이 그림에는 노년에 다다른 그의 여유와 경지가 느껴진다.

책은 이처럼 옛 그림 30여 점을 보여주고 문학을 통한 각 그림의 감상법을 제시한다. 소재가 되는 글귀와 간단한 해설을 먼저 소개하고, 그림을 감상한 뒤엔 한층 깊이 있는 긴 해설과 그림의 세부 장면이 뒤따르도록 배치해 자연스럽게 작품에 빠져들도록 배려한 편집이 돋보인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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