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단오절마다 양반들이 서로 주고받던 부채. 단오절에 부채를 선물하는 관습은 왕부터 일반 백성까지 당시 수직적 사회 질서를 재확인하는 역할을 했다.사진 제공 국립민속박물관
“지난 날 단오날에/선방(扇房)에서 은혜의 부채 내리셨네/내가(內家)에서 새로 만든 것이기에/긴 여름도 그것 때문에 시원했지….”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쓴 시의 한 구절이다. 이때의 부채는 임금이 하사한 부채를 가리킨다. 조선 후기 임금은 때마다 신하들에게 선물을 내렸다. 단오날에는 부채, 새해에는 약과 음식, 동지절에는 책력, 한여름에는 얼음, 한겨울에는 귤이었다.
조선 국왕은 왜 선물을 했을까. 이에 답하는 논문이 30일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 열린 ‘조선의 왕조체제와 선물’ 워크숍에서 발표됐다. 김혁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HK교수의 ‘왕의 선물: 조선왕조의 정치경제학’이다.
김 교수에 따르면 왕의 선물은 유교의 덕치(德治)를 실현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대학’ 치국(治國)편에는 왕이 재물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재물이 모이면 백성이 흩어지고 재물이 흩어지면 백성이 모인다”고 나온다. 재물을 나누어주는 일을 왕의 책무로 본 것이다. 김 교수는 “덕 그 자체는 초월적 가상으로 접근 불가능하지만 ‘너그러움’이라는 단서를 통해 가시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 왕은 선물을 통해 너그러움을 표현했고 이것이 바로 왕이 덕을 갖고 있다는 증거로 활용됐다”고 설명했다.
왕이 내리던 선물 중에서도 부채는 대부분 순수하게 선물 목적으로만 생산, 유통됐다. 김 교수는 “국왕이 증여하는 절선(節扇)은 그의 인격과 직접 연결된 것으로 국왕이 자신의 일부를 신하들에게 떼어 준다는 것을 상징했다. 국왕은 이 증여를 통해 이념적으로 잠재된 군신 관계를 눈앞에 드러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가 발표문에서 제시한 단오 부채의 생산과 유통 구조를 보면 왕의 선물은 일반 백성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왕이 직접 하사하는 대상은 양반가와 삼군영뿐이지만 선물용 부채를 생산, 상납하는 각 지역 감영의 감사가 고을 수령과 관리들에게 단오 부채를 나누어 주었다. 동시에 백성들이 부채의 재료를 상납하고 이를 부채로 제작해 국왕에게 올리는 상납의 흐름도 존재했다.
선물은 예치의 실현이기도 했다. 김 교수가 당시 영남 감영의 절선소(節扇所) 문서를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가문마다 받을 수 있는 부채는 100자루, 40자루, 30자루 등으로 각각 달랐다. 100자루를 받을 수 있는 가문은 7곳뿐이었다. 김 교수는 “부채 선물에서 나타난 포함과 배제의 원리는 조선의 왕조 체제를 표상한다. 이는 ‘예기’에 나오는 ‘예는 서인(庶人·서민)까지 내려가지 않고, 형(刑)은 대부(大夫) 이상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구절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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