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관아에서 재판받던 70대 노파 왜, 자신을 노비라고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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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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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소송에서 오늘날의 피고는 척(隻)으로 불렸다. 남에게 원한을 사지 않도록 하라는 뜻으로 쓰이는 ‘척지지 말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19세기 말 관아에서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 제공 너머북스
조선시대 소송에서 오늘날의 피고는 척(隻)으로 불렸다. 남에게 원한을 사지 않도록 하라는 뜻으로 쓰이는 ‘척지지 말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19세기 말 관아에서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 제공 너머북스
◇나는 노비로소이다/임상혁 지음/264쪽·1만5000원·너머북스

1596년 3월 13일 전라도 나주 관아에서 희한한 노비소송이 벌어졌다. 원고 이지도는 일흔이 넘은 여인 다물사리가 양인이라고 주장하고, 피고 다물사리는 스스로 노비라고 말했다. 노비의 신분을 다투는 소송에서 자신이 노비라고 하는 주장 자체가 이례적이었다.

두 사람은 법에 따라 판결해달라는 시송(始訟)다짐 뒤 삷등(白等)을 했다. 삷등은 최초 진술을 뜻하는 옛말로 한자는 이두식으로 음차한 것이다. 이지도는 다물사리 남편이 자신의 아버지 소유 노비인 윤필의 아들이라는 점을 들어 그 자손들도 자기 집안의 (사)노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의 양천제(良賤制)에 따라 부모 중 한쪽이 노비이면 그 자손도 노비가 되기 때문이다. 다물사리는 노비 남편과 결혼했지만 양인 신분을 지녔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경우 부인이 양인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물사리는 그럼에도 이 송사에서는 자신은 성균관의 관비(官婢)인 길덕의 딸로서 관비라고 주장했다. 이는 자손들이 혹독한 처우를 받는 사노비가 되는 것을 막고 비교적 처우가 괜찮은 관비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아버지가 사노(私奴)라 하더라도 어머니가 관비이면 자손들은 모계를 따라 모두 관비가 된다.

송관(訟官) 김성일은 증거조사에 들어갔다. 호적을 조사해 양인을 자기 노비라고 호적에 올리는 암록(暗錄)이 아닌지, 이와 반대로 피고가 역(役)을 피하기 위해 세력가나 기관에 몸을 맡기는 투탁(投託)을 하지는 않았는지 따졌다. 조사 결과 다물사리는 자손을 관노비로 바꾸려고 사위와 공모해 성균관에 투탁한 것으로 드러났다. 송관은 다물사리의 딸과 그의 소생들을 이지도의 어머니 서씨 부인에게 사노비로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숭실대 법학과 교수인 저자는 이 책에서 다물사리와 이지도의 소송을 대표적인 예로 들어 조선의 사법제도와 노비제를 밝힌다. 저자는 “대충 일을 처리할 때 ‘원님 재판하듯 한다’는 말을 쓰지만 조선의 재판은 법과 제도에 따라 감탄할 정도로 합리적이었다”고 말한다.

19세기 말 관아에서의 소송 장면을 묘사한 그림. 화가 김윤보의 ‘행정도첩’에 실려 있다. 사진 제공 너머북스
19세기 말 관아에서의 소송 장면을 묘사한 그림. 화가 김윤보의 ‘행정도첩’에 실려 있다. 사진 제공 너머북스
당시에도 상소(上訴)제도가 있었다. 지방 수령에 의한 판결에 불만이 있으면 관찰사(觀察使)에게 항소(抗訴)하고, 다음으로 중앙의 형조나 사헌부에 상고(上告)할 수 있었다. 그래도 억울할 땐 임금이 지나가는 길을 막고 징을 치는 격쟁(擊錚) 상언을 통해 하소연했다. 태종 2년(1402년)에는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해 임금이 직접 의견을 들었는데, 노비소송에 관한 것만 수없이 들어오자 이와 관련해 신문고를 치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다.

소송 당사자와 일정한 관계가 있는 법관은 재판에서 배제하는 오늘날의 제척(除斥)처럼 당시에도 상피(相避)가 있었으며 승소자는 소송비용으로 노비 관련 소송의 경우 백지 책 3권, 기와집과 논밭은 2권, 초가집은 1권을 부담했다.

특히 15, 16세기의 민사소송은 노비에 관한 것이 주를 이뤘다. 이 때문에 소유권과 상속에 관한 규정도 노비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노비제는 1801년 1월 28일(음력) 순조의 하교(下敎)로 관노비가 해방되고 1894년 갑오개혁으로 사노비도 예속에서 벗어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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