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형욱 5단(26)은 입이 바싹 마르는 듯하다. 수읽기에 몰두하다 자신도 모르게 바둑판 위까지 머리가 기울어진 것을 깨닫고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앉는다.
10일 서울 성동구 홍익동 한국기원에서 열린 주 5단과 이창호 9단의 국수전 4강전. 중반전 막바지에 우하귀가 승부처다. 주 5단은 귀에서 살 것인지를 놓고 수읽기와 형세판단을 반복하고 있다. 머릿속에선 아직 득실이 정리되지 않았는데 계시원은 초읽기를 득달같이 하고 있다. 신산(神算) 이 9단을 상대로 더는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중압감이 가슴을 짓누른다.
초반 진행은 좋았다. 좌변에서 백의 무리한 행마를 적절히 응징하며 우세를 확보했다. 대국 승패를 알아맞히는 인터넷 바둑사이트의 베팅에서도 초반 이 9단에게 거는 사람이 압도적이었지만 100수 언저리에선 주 5단에게 거는 사람이 많아지기도 했다.
중반에 좀 더 거리를 벌릴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약간 느슨한 행마를 하자 이 9단이 귀신같이 알아채곤 많이 쫓아왔다. 아직도 우세하지만 한 번 더 실수가 나오면 역전되기 십상이다.
주 5단은 이 대국을 무척 기다렸다. 성적을 내는 10대와 20대 초반 기사들에게 추월당해 승부사로선 이미 끝난 것 아니냐고 눈치를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 국수전에서 이 9단을 넘어 결승전에 오른다면 바둑 인생이 달라질지 모른다.
우하귀에서 득실을 가리기가 여전히 어렵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다면….” 그러나 이미 초읽기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주 5단은 우하귀에서 장면도 흑 1(실전 123)로 삶의 모양을 갖추기로 마음먹는다. 주 5단은 백이 이 돌을 잡으러 오길 바라고 있다. 그러면 주 5단은 흑 돌을 버리는 사석작전으로 우세를 확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여기서 이 9단은 흑의 빈틈을 봤다. 흑을 잡지 않고 백 2로 마늘모한 수가 흑의 의표를 찌르는 수. 주 5단의 기대와는 달리 흑이 귀에서 살고 백은 8로 우변을 차지하는 대교환이 벌어졌다. 이건 역전이다. 여기서 흑 7을 생략하면 백 ‘가’로 흑 말이 끊긴다.
흑 1이 한 박자 늦었다는 결론이었다. 귀를 그냥 버려두고 먼저 ‘나’에 젖혀 백 ○ 한 점을 잡으며 중앙을 차지했으면 우세했다는 것이 국후 검토에서 두 기사의 일치된 견해였다.
오후 5시. 부족한 실리를 쫓아가려고 우상귀 백을 노렸지만 백이 살아가자 주 5단은 돌을 던졌다. 잠시의 침묵.
이 9단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중반까진 내가 안 좋았지.”
30여 분의 복기를 마친 뒤 주 5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다시 이런 기회가 올 수 있을까.’ 후회와 함께 피로가 밀려왔다.
이 9단은 결승 5번기에 진출해 통산 10회 우승을 노리게 됐다. 나머지 4강전은 3월 3일 홍기표 4단과 안형준 2단의 대결로 열린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