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150강좌… 한껏 즐기는 ‘인문학 뷔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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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대중화의 기수 ‘철학아카데미’ 설립 10돌

대중과 호흡하는 인문학을 지향해 온 철학아카데미가 10년을 맞았다. 19일 오후 8시 서울 중구 장충동 철학아카데미 강의실에서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강의를 하고 있는 김진영 상임위원. 변영욱 기자
대중과 호흡하는 인문학을 지향해 온 철학아카데미가 10년을 맞았다. 19일 오후 8시 서울 중구 장충동 철학아카데미 강의실에서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강의를 하고 있는 김진영 상임위원. 변영욱 기자
《생명은 엔트로피에 저항한다고 했다.
19일 오후 8시, 족발집과 주점이 즐비한 서울 중구 장충동 유흥가에 자리한 사단법인 철학아카데미의 모습이 그랬다.
주변의 흐트러진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철학의 기운을 흡수하려는 사람들이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베르그송의 형이상학 사유와 운동’,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강의실의 하얀 출입문에는 녹록지 않은 강좌명이 붙어 있었다. 3곳의 강의실에는 6∼11명이 공간으로 흩어지는 텍스트를 열심히 지면(紙面)으로 채집하고 있었다.
‘대중과 호흡하는 인문학’을 지향하는 철학아카데미가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일반인을 위한 인문학 강좌가 드물었던 시절, 인문학 대중화를 선도한 철학아카데미 강좌는 현재 수준 높은 인문학 강좌로 진화하고 있다.》

수강생 수준 높아져 점점 세분화
일반적인 강좌는 폐강되기도
비슷한 기관 늘어나 운영난 심각


철학아카데미 10년에 스며 있는 인문학 대중화의 역사는 어떤 모습일까. 철학아카데미는 2007년 강좌 중심의 ‘사단법인 철학아카데미’(조광제 원장·서울 중구 장충동)와 연구모임 중심의 ‘철학아카데미’(이정우 원장·서울 마포구 동교동)로 분리됐다.

○ 전문화되는 인문학 강좌

장충동의 철학아카데미는 올겨울 총 42개 강좌를 진행 중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학기를 통틀면 150여 개나 된다. 강좌 제목을 보면 여느 인문학 대중 강좌와는 결이 다르다.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 강독처럼 철학적 교양이 있는 사람들이 들을 법한, 구체적이고 전문적인 강좌가 많다. 라틴어와 희랍어를 가르치는 어학 수업도 약 10개 진행 중이다.

처음 출범하던 2000년 3월, 80여 개이던 강좌는 10년 동안 2배 가까이 불어났다. 수강생들의 수준이 점차 높아져 구체적이고 세분된 강좌가 많아진 것. 최근에는 일반적인 인문학 강좌는 오히려 수강인원을 채우지 못해 폐강이 되는 상황이다.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원장은 “창립 10년을 맞아 대중과의 접점을 넓혀야 할지, 전문화된 인문학 강좌를 제공해야 할지 고민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19일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이 강의하는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강좌에 참석한 11명의 수강생 중에는 대학교수도 있었다. 충주대 교양과정부 김소희 교수(교육인류학)는 “깊이 있는 강의 덕분에 글쓰기와 논문 집필 등에 많은 영감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영문학 박사과정 학생, 사진작가, 퇴직 교장 선생님, 사진을 전공하는 대학생 등 수강생의 연령과 배경은 다양하다. 지난 10년간 마련된 강좌 수는 1027개에 달한다.

동교동의 철학아카데미는 회원 20여 명이 주축이 돼 연구와 저술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은 “시중에 일반 인문학 강좌가 늘어 보다 전문적인 연구에 주력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며 “서양의 사상이 아닌 한국적 맥락의 사상을 만드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문학 분야 대학원생과 교수들이 참여하고 있다. 면접을 통해 회원을 받고 있다.



○ 인문학 ‘둥지’ 역할과 여전한 운영난

철학아카데미는 지난 10년간 대중의 인문학적 갈증만 해소한 것이 아니다. 제도권에서 흡수하지 못한 문학과 역사, 철학 분야 전문 연구자들에게 강의를 통해 사회와 소통하는 장도 제공했다. 지금까지 이곳을 거쳐 간 강사는 220여 명. 수년간 배운 전문 지식을 사장시키지 않고 사회에 흡수되도록 통로를 제공한 셈이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지만 ‘선순환’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3, 4년 사이에 대중에게 인문학적 지평을 넓혀주는 일반 강좌는 크게 늘었지만 이런 수요가 대학이나 학계의 인문학자 수요로는 연결되지 않고 있는 것. 최근 예산의 지원을 받는 일반 인문학 강좌가 늘어나면서 장충동의 철학아카데미를 찾는 전체 인원은 오히려 조금씩 줄고 있다. 이 때문에 강사로 나선 5명의 상임위원은 거의 무료로 강의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철학아카데미가 기여한 공로는 적지 않다. 서울대 철학과 이남인 교수는 “철학아카데미는 대학 밖에서 철학에 목말라하는 대중에게 필요한 것을 전달했고, 젊은 박사들에게는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며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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