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대필작가 ‘콩고 모험담’ 대성공 뒤엔…

  • 입력 2009년 5월 30일 02시 59분


일러스트 제공 들녘
일러스트 제공 들녘
◇콩고의 판도라/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지음·정창 옮김/600쪽·1만3000원·들녘

이 소설은 우스꽝스러운 한 편의 시로 포문을 연다. 아무리 주의를 기울이며 찬찬히 읽어도 소설을 다 읽기 전까지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매우 아리송한 시다.

‘사랑스러운 암감에게//콩고, 푸른 대양. 그러나 그 나무들 세상, 그 밑에는 아무것도 없다/그대, 지하의 안개/나, 날개 없는 두더지…눈앞이 캄캄하다/종단전쟁/빗발 아래 타오르는 횃불들/밀가루 같은 피부를 통해 전해지는/커피포트 같은 뜨거운 열기뿐.”

작가이자 잡지기자였던 주인공 토마스 톰슨이 60년 전의 일을 회상하며 쓴 이 시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조잡한 나열에 불과한 것 같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짤막한 시에 앞으로 전개될 소설의 주요 내용이 압축돼 있다. 재기 넘치는 화술과 독창성으로 주목받는 스페인의 젊은 작가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사진)이 20세기 초 영국을 배경으로 쓴 ‘콩고의 판도라’는 적지 않은 분량에도 기발한 입담과 서사의 흡인력 덕에 초반부터 단숨에 읽힌다.

젊은 시절, 괴짜들이 득실대는 영국 런던의 빈민가에 세 들어 살며 작가가 되겠다는 꿈에 사로잡혀 있던 톰슨은 가난한 ‘노예 작가(대필 작가)’였다. 하지만 단순한 대필 작가가 아니라 대필 작가의 또 다른 대필 작가였다. 그는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소설로 인기를 끌던 루터 플래그 박사의 작품을 대필한다. 의뢰인을 통해 ‘한 미남 선교사의 콩고 밀림 모험기’를 쓰라고 주문한 플래그 박사의 노트를 전달받는데, 한마디로 황당무계한 내용이다. 노트에 적힌 플래그 박사의 구상에는 피그미족은 식인종이고, 밀림에 사자가 있으며, 인간은 포자번식을 한다. 톰슨은 그가 정말 박사인지 의심을 품지만, 대필 작가에겐 그런 데 이의를 제기할 권한이 없다. 노예의 노예에 불과한 그는 수수료를 떼인 뒤 쥐꼬리만 한 원고료로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며 죽도록 대필을 한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자신과 플래그 박사 사이에 있는 대필 작가가 한 명 이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알고 보니 그는 플래그 박사의 대필 작가의 대필 작가, 그 대필 작가의 또 다른 대필 작가였던 것이다. 적자생존 사회의 먹이사슬에서 문학계 역시 성역이 아니었다.

“방탕한 영감탱이! 천박한 고리대금업자이자 파라오 같은 중상모리배! 기회주의에 물든 악당 같으니!” ‘노예’들을 희생시켜 명성을 얻은 플래그 박사에 대해 톰슨은 분노하지만, 플래그는 그가 누군지도 모르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가 노튼 변호사를 만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톰슨의 작가적 재능과 콩고 모험기를 눈여겨본 노튼은 자신이 변호하고 있는 살인 용의자 마커스가 겪은 콩고 탐험을 책으로 써보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마커스는 콩고에서 찰스 크레이버 공작의 두 아들, 윌리엄과 리처드(한 명은 은행 사기경력, 한 명은 아동성폭행 경력이 있다)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돼 있다. 결백하다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마커스는 하인신분이고, 그가 맞서야 하는 대상은 최상류 귀족이다. 노튼은 진실을 알리는 데 문학이 기여할 수 있지 않겠냐고 톰슨을 설득한다. 톰슨은 마커스를 면회하면서 마커스가 아프리카 콩고에서 겪은 기상천외한 일들을 인터뷰한다. 취재를 바탕으로 톰슨은 공작의 두 아들이 콩고의 밀림에서 흑인들에게 저지른 만행과 신인류에 가까운 텍톤족의 등장, 새하얀 치즈 피부를 가진 텍톤족 공주 ‘암감’과 마커스의 사랑 등 역동적인 이야기가 담긴 책을 펴낸다. 한마디로 ‘정글의 가혹함, 부패한 형제들의 광기, 그리고 지하문명의 급습에 대항한 영국 청년의 신기한 모험’기다. 책은 대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제국주의 시대 인종차별과 황색 저널리즘을 유머러스하게 비꼬며 신나게 질주하던 소설은 마커스의 재판 뒤 흥미로운 마지막 반전을 마련해뒀다. 진실에 접근하겠다는 사명감으로 진지하게 집필에 임했던 톰슨은 결국 세상이 무수히 많은 플래그 박사와 노예 작가들의 얽히고설킨 이해관계로 구성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끝까지 긴장을 놓칠 수 없는 작품이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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