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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년 4월 29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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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창문을 열 때 기대하는 것은 대개 세 가지다. 빛, 바람, 그리고 풍경. 제주 서귀포시 중문동에 3월 들어선 ‘까사 델 아구아 갤러리’는 창문을 열어 그 세 가지를 맞이할 때 비로소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설계자인 멕시코 건축가 리카르도 레고레타 씨(78)는 “일렁이는 바다 위 은색 달빛을 보면서 느끼는 즐거운 호기심이 내 건축의 모든 이유”라고 했다. 스페인어로 ‘물의 집’을 뜻하는 까사 델 아구아 갤러리 역시 ‘건물이 앉을 땅의 가치’에 대한 고민을 토대로 세워졌다. 중문로에서 내려다본 이 건물은 길게 맞닿은 바다와 산줄기 틈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파란 물과 녹색 나무를 연결하는 것은 갈색의 흙. 밝은 적갈색 벽체는 물과 나무의 풍경 안에 선명한 색감을 더하면서 경계를 부드럽게 이어 묶는 흙의 역할을 한다.
복도와 계단을 메운 화려한 핑크색은 과시를 위한 치장이 아니다. 빛을 맞이하기 위한 빈 그릇의 용도. 빛과 그림자를 얻은 벽체는 이 갤러리가 선보이는 첫 전시품이다. 벽에 걸린 그림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외부 빛을 차단하고 흰색으로 칠하는 갤러리 인테리어의 관습이 이곳에서는 의미가 없다. 자연광과 외부 경관을 감상의 대상으로 끌어들이는 이런 경향은 프랑스 건축가 장 누벨 씨의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거친 현무암으로 울퉁불퉁 쌓은 담을 따라가면 흙을 쌓아 올린 듯한 적갈색 벽체 안으로 동굴처럼 벌어진 입구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연못 위에 띄워 놓은 동그란 돌 조각은 제주의 물과 돌에 대한 건축가의 이해를 보여준다. 문을 젖힌 시선에는 송악산과 하늘, 바다가 걸린다. 갈색 문 바로 옆의 보라색 벽, 그 바깥쪽을 둘러싼 주황색 벽에 차례로 걸린 빛과 그림자는 그 풍경을 감싸는 여러 겹의 프레임이 된다.
2층 발코니에서 내려다본 창문 위 천장에는 파란색 서까래를 줄줄이 붙였다. 공간의 안팎을 연결한 서까래들은 바깥 풍광을 건물 안으로 끌어들인다. 레고레타 씨는 전통문화 요소에 현대적 감수성을 입혀 재해석하는 건축가. 한국에서 찾은 것은 전통 가옥의 지붕 처마를 닮은 이 디테일이다. 그의 건물에는 쓰임새가 없는 장식이 없다. 창을 열어 끌어들인 빛과 그림자가 공간에 악센트를 주는 장식이 된다. 이질적인 장식을 배제한 공간에서 모든 요소가 유연하게 이어진다. 곡선을 잘 쓰지 않는 그의 공간이 유연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먼발치서 봤을 때 입구 안쪽 외벽에는 비스듬히 새겨진 여러 겹의 치장줄눈이 있는 것 같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본 그것은 지붕 위 틈새에서 갈라져 들어온 여러 겹의 빛과 그림자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