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 오키나와로 갔나

  • 입력 2009년 4월 20일 02시 57분


일본 오키나와 현 우라소에 시에서 나온 기와들. 고려시대 기와와 닮은 꼴이어서 삼별초가 몽골에 패한 뒤 오키나와로 갔다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사진 제공 KBS
일본 오키나와 현 우라소에 시에서 나온 기와들. 고려시대 기와와 닮은 꼴이어서 삼별초가 몽골에 패한 뒤 오키나와로 갔다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사진 제공 KBS
오늘 KBS ‘역사추적’, 고려와 닮은꼴 기와 출토 근거로 가설

2007년 국립제주박물관의 ‘해양문물교류특별전, 탐라와 류큐왕국’전에 전시된 유물 중에는 1955년 오키나와 현 우라소에 시에서 발굴된 기와들이 있다. 그중 한 수막새에 새겨진 뾰족한 꽃잎과 가운데 씨방의 모양은 전남 진도 용장산성에서 출토된 기와와 흡사하다.

사다리꼴 모양의 또 다른 암키와 한 점에는 ‘癸酉年高麗瓦匠造’(계유년에 고려의 기와 장인이 만들었다)는 명문이 있다. 고려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 패한 1273년이 계유년이다.

KBS1 ‘역사추적’은 20일 오후 11시 반 고려의 대몽골 항쟁을 이끌었던 삼별초가 패배 후 오키나와 섬으로 이동했다는 가설을 담은 ‘삼별초, 오키나와로 갔는가’ 편을 방영한다.

오키나와에서는 1982년 ‘수리’(오키나와 류큐 왕국의 두 번째 수도) 성 발굴조사에서도 어골문(魚骨紋)이 새겨진 기와가 대량 출토됐다. 어골문은 고려 기와의 대표적인 무늬다.

1231년 몽골의 침입을 받은 고려는 40년간 대항하다 항복한다. 고려의 군사조직 삼별초는 고려 정부의 항복 뒤에도 진도,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며 대몽골 항쟁을 이어간다. 1271년 진도에서는 일본 정부에 몽골에 대항해 함께 싸우자는 외교 문서를 보내지만 일본 정부는 고려 정부가 아닌 삼별초의 문서에 답을 하지 않는다. 다시 제주도로 후퇴한 삼별초는 여몽연합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패한다. 지휘관 김통정은 자결하고, 1300명의 병사는 포로가 된다. 프로그램은 이 중 잡히지 않고 살아남은 이들이 오키나와로 이동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오키나와는 일본 규슈 서남쪽에서 대만 사이의 1200km에 이르는 열도 중 가장 큰 섬이다. 오키나와인들은 1000년경에도 석기를 사용하며 채집 생활을 했지만 삼별초가 패배한 13세기에는 ‘구스크’(성을 일컫는 오키나와 말)에 기초한 세력집단이 여럿 등장하는 등 사회조직이 급속히 발전했다.

연출 김형운 PD는 “일부 학자는 오래전부터 외부 문명이 유입돼 오키나와가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급속히 변모했을 것으로 추측했다”며 “제주도에서 패배한 뒤 역사의 기록 속에서 사라진 삼별초가 오키나와로 갔을 것이라는 가정에 기초했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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