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불황과 타협한 파리

  • 입력 2009년 3월 20일 03시 00분


2009 가을·겨울 파리패션위크 현지르포

파리는 여자다.

때로는 수다스럽지만 가슴이 시릴 정도로 무심한 여자다.

맨얼굴에 낡은 실크 스카프를 두르고도 근사한 그녀는, 방브 벼룩시장과 영화 ‘비포 선 셋’으로 친근해진 중고 책방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에서 오래된 것들의 진가(眞價)를 찾는다.

노점의 과일가게, 발길 닿는 곳마다 ‘파리다운’ 마레 지구의 골목길, 몽테뉴대로와 포부르 생토노레 거리의 화려한 상점들….

파리라는 단어에 성별이 있다면 십중팔 구 여자일 거라고 추측해본다.

만인이 사랑하는 여자, 프랑스 파리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패션이다. 세계 4대 패션 컬렉션 중 하나인 ‘2009 가을겨울 파리 패션위크’가 열린 춘삼월의 파리 현지 생중계!

○ 방돔 광장에서 마주친 파리 스타일

5일 오후 파리 시내 방돔 광장 앞. 오페라극장과 튈르리 정원 사이에 있는 직사각형의 이 광장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루이 14세의 기마상을 세우기 위해 구획됐던 이곳은 유명 브랜드 상점이 많아 파리에서도 가장 상류사회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18세기 양식으로 꾸민 최고급 호텔인 ‘리츠 파리’ 정문 앞은 그 자체로 한 편의 패션쇼 같았다. 미끄러지듯 정차하는 고급 승용차에서 유명 패션계 인사가 속속 내리자 수십 명의 취재진이 달려들었다.

“프린세스(시리와나와리 나리라따나 태국 공주), 여기 카메라 좀 봐 주세요.”

“저기에 에바(체코 모델 에바 헤르지고바)가 왔다!”

얼마 전부터 패션계의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는 프랑스 브랜드 ‘발망’의 패션쇼가 이 호텔 수영장에서 열린 것이다.

크리스토프 데카르냉 발망 디자이너는 고(故) 잔니 베르사체가 생전에 오트 쿠튀르(고급 맞춤복) 쇼를 열던 리츠 파리에서 1980년대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스타일을 선보였다.

그것은 탁구공을 넣은 듯 단단하고 각지게 솟아오른 어깨선이었다. 발망뿐 아니라 ‘니나리치’, ‘크리스티앙 디오르’ 등 수많은 브랜드의 쇼에서 같은 스타일이 쏟아져 나왔다.

함께 취재를 하던 각국 패션 전문기자들은 “글로벌 불황을 헤쳐 나갈 여성의 강한 이미지를 표현하는 데는 각진 어깨선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패션쇼를 찾은 멋쟁이들은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을 걸 예상이라도 한 듯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했다.

아담한 키와 금발의 한 패션 바이어는 요즘 유행하는 ‘랑방’ 체인백과 정교한 재단의 검은색 ‘콤 데 가르송’ 코트로 멋을 냈다. 프랑스 패션잡지 ‘보그’ 기자는 검은색 가죽 레깅스와 킬 힐(굽이 15㎝ 이상인 높은 하이힐)에 헐렁한 흰색 그래픽 티셔츠를 받쳐 입었다. 검은색 정장에 굽 낮은 흰색 ‘레페토’ 옥스퍼드화를 신은 여자도 눈에 띄었다.

너무 차려입지 않은 것처럼 조금은 숨통을 두는 패션, 실험적이지만 어딘가 한 군데 여성의 섹시미를 드러내는 패션. 이것이 파리 스타일이다.

각진 어깨 - 란제리 톱 - 헐렁한 팬츠

허세 안부리고 남성 - 여성성 ‘동거’

○ 세계 패션산업의 ‘보이지 않는 손’

6일 평화로운 튈르리 정원의 이동 천막무대에선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패션쇼가 열렸다.

프랑스 퍼스트레이디 카를라 브루니 여사가 사랑하는 ‘프랑스 국민 브랜드’답게 대형 관람석은 빼곡히 차고 앞줄 손님들의 면면은 화려했다

50대인데도 군살 하나 없이 섹시한 카린 로이펠트 프랑스 ‘보그’ 편집장,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실제 모델이었던 애너 윈투어 미국 ‘보그’ 편집장, 이탈리아 편집숍 ‘10코르소 코모’ 대표(카를라 소차니)의 동생인 프랑카 소차니 이탈리아 ‘보그’ 편집장….

세계 패션계를 쥐락펴락하는 ‘보이지 않는 손’들이다. 그들은 아직 봄이 채 오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올 가을겨울 패션의 성패를 머릿속으로 분주하게 따지고 있으리라. 패션 디자이너들을 발굴하고 키우기도 하는 이들은 늘 이렇게 세월을 앞서 나가며 산다.

이날 흰색 코트에 빨간 하이힐을 신고 나타난 로이펠트 씨는 10여 년 전 ‘구찌’를 회생시킨 디자이너 톰 포드의 뮤즈(영감을 주는 사람)였다. 과거 디자이너 지방시의 뮤즈가 배우 오드리 헵번이었다면 요즘엔 엠마뉴엘 알트 프랑스 ‘보그’ 패션 디렉터가 ‘발망’의 뮤즈다.

프랑스 전자음악인 로랑 울프의 ‘노 스트레스’가 쩌렁쩌렁 울리며 시작된 올해 디오르의 쇼는 오리엔털리즘에서 한껏 영감을 받았다.

금색 모피 조끼를 입은 한 모델은 클레오파트라 같았다. 하늘색 투명 드레스를 입은 또 다른 모델은 가는 T팬티로 은밀한 부위만 가린 탐스러운 엉덩이를 흔들며 무대를 누볐다. 쇼 음악 소리는 더욱 커졌다. “난 오늘 일하기 싫어요. 섹시한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와 쉬고 싶어요. 스트레스 받지 말고 마음 편히 먹자고요.”

쇼가 끝난 후 디오르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존 갈리아노 씨가 무대로 나와 피날레 인사를 했다. 금세기 최고의 패션 천재 중 한 명인 그는 1997년 디오르에 합류해 ‘디오르=섹시’ 공식을 성립시켰다. 중절모를 눌러 쓴 익살스러운 그에게 관객은 환호했지만, 솔직히 이번 쇼 자체에 대한 반응은 뜨겁지 않았다. 언뜻 웃고 떠드는 것 같은 객석은 실상 냉혹했다.

“뭐랄까. 이번 쇼는 열정이 부족해 보였어요. (쇼 치고는)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옷이었으니까요. 하긴 지금은 럭셔리 산업이 어려운 때니까 (이해할 만하죠).”(수지 멘키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패션 전문기자)

쇼 장 바로 앞에선 동물보호단체인 PETA 회원들이 ‘모피는 죽었다’란 플래카드를 들고 서서 모피를 입은 사람들에게 야유를 던졌다.

어쩌면 패션은 그것을 ‘만들고(디자이너), 전하고(미디어), 홍보하고(PR 담당자), 파는(바이어)’ 소수 그룹, 그들만의 리그에서 벌어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깨선이 올라가고 바지폭이 헐렁해진 요즘 유행은 이들 소수가 창조하고, 대다수가 베껴 전파시킨다.

복잡다단한 패션계의 ‘음모’는 잘 모른 채 지금 이 순간 중국에서도 인도에서도 ‘순진한’ 소비자들은 그들을 빛내줄 패션을 몸에 걸치기 위해 지갑을 연다. 모델의 섹시함에 이끌려, 또는 예술과 스토리텔링(이야기)으로 포장된 이미지에 만족을 느끼며….

○절묘한 판타지와 현실 사이

파리 패션위크는 빡빡하게 짜인 스케줄대로 움직인다.

1시간 단위로 10여 개의 패션쇼가 각기 다른 장소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각국에서 모여든 패션 기자와 바이어들은 분주해진다. 쇼가 끝나면 미리 대기하고 있는 셔틀버스를 타고 또 다른 쇼로 이동한다.

패션쇼의 관람석은 한정돼 있다. 쇼가 시작되기 몇 주 전부터 입장을 신청하면 각 브랜드의 ‘심사’를 통해 좌석을 받게 된다. 영향력 큰 매체나 사람일수록 좋은 자리다. 유명 쇼는 초대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 좌석 없이 서서 봐도 감지덕지다.

파리 패션위크에선 루브르 박물관 지하, 방돔 광장과 튈르리 정원 주변이 쇼가 열리는 단골 장소다. 이 기간엔 궁전, 미술관, 대학 강의실, 파사주(차가 들어갈 수 없는 옛날 보도) 등 파리 곳곳이 패션쇼장으로 변신한다.

패션쇼 사진이 실시간으로 인터넷에 뜨더라도, 패션쇼는 현장에서 직접 봐야 디자이너의 의도를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펑키한 영국 브랜드 ‘비비안웨스트우드’의 쇼는 육감적 여배우 패멀라 앤더슨을 모델로 세웠다. 진달래색 티셔츠와 무릎까지 오는 긴 양말에 연분홍색 발레리나 튀튀를 마치 날개처럼 단 앤더슨이 나타나자 패션쇼장은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쇼 비즈니스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앤더슨은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금발 머리를 손으로 헝클며 ‘섹시 스타’의 힘을 내뿜었다. 그녀가 반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나타났을 땐 큰 가슴으로 인해 재킷 단추가 떨어져 나갈 듯했다.

또 ‘이세이 미야케’의 디자이너인 후지와라 다이 씨는 일본 무술인 가라테 시범을 쇼 곳곳에 넣어 ‘종이처럼 구겨지는’ 옷의 역학을 강조했다. 국내 디자이너 이상봉 씨는 조선시대 까치 호랑이와 신윤복의 미인도를 모티브로 삼았다.

‘니나리찌’의 쇼는 객석의 기립 갈채를 받았다.

장중한 음악과 함께 모델들이 등장했을 때 쇼 장은 충격에 빠져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20cm는 족히 될 만한 구두는 앞부분이 지극히 높아 뒷부분 굽이 공중에 떠있는 기괴한 디자인이었다. 모델들이 그 아찔한 구두에 어떻게 몸을 싣고 걷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상의가 어깨선을 잔뜩 강조했다면, 바지는 물결치듯 팔락였다.

트렌드 정보사 PFIN은 이번 파리 패션위크에 대해 “콧대를 세우며 허세를 부리던 전통적인 쿠튀르 하우스들이 현대적 감성을 바라는 여자들로부터 점차 외면당하자 새로운 방향성을 모색하는 적극적 움직임을 나타냈다”고 분석한다.

고루하고 무거운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디자이너들은 그들이 ‘가장 잘하는 것’에 매달렸다는 것이다. 각진 재킷과 란제리 같은 톱의 조합은 ‘남성스러움과 여성스러움의 공존’을 드러냈다. 세상이 각박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디자이너들이 세상과 타협한 것이리라. 현란한 파리 패션의 무대도 불황은 비켜 나가지 못했다.

글=파리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디자인=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명품에 짙은 화장?… 튀지 않는 검은색으로 튄다▼

○ 파리 거리의 멋쟁이들

화려한 무대는 결국 ‘쇼’이며 판타지며, 이미지다.

평범한 파리지엔들의 일상과 패션을 느끼기 위해 파리의 골목 구석구석을 다녔다.

파리에 머무는 6일 동안 ‘루이비통’ 가방을 든 파리 여자는 방돔 광장 앞에서 단 한 명 만났을 뿐이다. 오래된 ‘에르메스’ 가방을 든 백발의 할머니는 여럿 만나긴 했지만.

대개의 파리 여자들은 브랜드가 드러나지 않는 옷과 가방으로 자연스레 멋을 내고 있었다. 그들의 조막만한 얼굴과 축복 받은 기다란 몸매가 차림새를 돋보이게 했다.

루이 14세가 살았던 궁전인 팔레 루아얄 근처 빈티지 숍 ‘디디에 뤼도’에 들어갔다. 미리 약속을 잡은 게 아니었는데 운 좋게도 주인인 유명 빈티지 컬렉터, 디디에 뤼도 씨가 서 있다.

서울의 멀티숍 ‘10코르소 코모’에 진열돼 있던 1960년대 ‘샤넬’ 정장의 주인이 눈앞에 서 있다니…. 그가 걸친 줄무늬 정장, 와인 색 셔츠, 앞코가 뾰족한 호피무늬 구두는 약간 빛바랬어도 참 자연스러웠다.

뤼도 씨는 체구가 작은 내게 ‘에밀리오 푸치’의 빈티지 원피스를 권했다.

“세월이 가치를 빚는 빈티지는 유행이 없어요. 유행을 일일이 좇는 건 촌스럽지 않나요?”

그가 운영하는 또 다른 빈티지 숍 ‘라 프티 호브 누아르’(검은색 미니 드레스)엔 파리 여자들이 사랑하는 갖가지 디자인의 검은색 미니 드레스들이 걸려 있었다. 검정은 튀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스타일을 가능하게 하는, 파리의 색이다.

토요일 오전엔 방브 벼룩시장에서 또 다른 파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옛날 유화와 가구, 앤티크 장신구, 깃털 달린 빈티지 모자….

사실 파리의 모든 예쁜 색감은 시장에 있었다.

마레 지구의 과일 노점에 진열돼 있던 탐스러운 자두와 바나나, 고급 백화점 ‘봉 마르셰’로 가는 골목길에서 마주친 작은 꽃집의 튤립, 샌드위치 체인점 ‘폴’의 바게트들…. 어쩌면 이런 시장 풍경이 위대한 파리 스타일을 만드는 소소한 것들이 아닐까. 파리 여자들은 재래시장에서 장을 보고, 수중에 돈이 생길 때마다 꽃을 산다.

짙게 화장하지 않아도 ‘라르티장 파르퓌뫼르’의 은은한 맞춤 향수와 ‘마리아주 프레르’의 마르코 폴로 차를 곁에 두는 파리지엔. 그래서 파리는 만인이 흠모하는 신비로운 여자다.

파리=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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