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낭만요트? 극한의 삶!

  • 입력 2008년 10월 10일 02시 54분


닭장침대 - 빗물샤워… 9개월간 지구 한바퀴

 

 

 

배 위에서 선장은 ‘스키퍼(skipper)’로 불린다.

미국 보스턴 출신 스키퍼 켄 리드(47·사진) 씨는 ‘일 모스트로(스페인어로 괴물이라는 뜻)’라는 이름의 요트 위에 서서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빨간색 돛에 검은색 퓨마가 그려진, 웅장하면서도 날렵하게 잘 빠진 이 요트는 앞으로 9개월간 그와 생사고락을 같이할 존재다.

11일 스페인 알리칸테 항을 출발하는 이 요트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과 인도 코치, 싱가포르, 중국 칭다오(靑島),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미국 보스턴, 아일랜드 골웨이, 스웨덴 예테보리와 스톡홀름을 거쳐 내년 7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할 예정이다.

아메리카스 컵과 함께 세계 양대 요트 레이스로 꼽히는 ‘볼보 오션 레이스’의 대장정이 시작된 것이다. 11개 항구를 거쳐 3만7000마일(약 6만 km)을 일주하는 험난한 코스다.

레이스가 시작되기 전인 지난달 말 이 긴 여정의 출발지인 알리칸테를 다녀왔다. 이번 대회에는 리드 씨가 이끄는 푸마 팀을 비롯해 ‘텔레포니카 블루’, ‘에릭슨’, ‘델타 로이드’, ‘그린 드래곤’ 등 8개 팀이 참여했다.

○ 볼보 오션 레이스 내일 출발… 3만7000마일 일주

올해로 10회를 맞은 볼보 오션 레이스(격년제)에 처음 참가한 세계 ‘빅3’ 스포츠 브랜드 푸마는 이번에 21개국 29명의 기자를 알리칸테로 초청했다. 한국에선 동아일보 기자만 초대됐다. 기자들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일 모스트로’에 미리 탑승해 볼 수 있었다.

배 길이 21.5m, 돛대 높이 31.5m의 요트에 오르자 푸마 레이스 팀원 11명이 반갑게 일행을 맞았다. 배 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장하는 바우맨(bowman), 바람의 속도와 방향에 따라 돛을 바꾸는 트리머(trimmer), 네비게이터 등 요트 레이서들에겐 제각기 맡은 책무가 있다. 스키퍼는 이들을 총괄하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은 역할이다.

아메리카스 컵이 해안 근처에서 짧은 시간 이뤄지는 반면 볼보 오션 레이스는 여러 대양을 누비는 장기전이다. 이 때문에 팀워크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리드 씨에게 자신만의 ‘세일링 리더십’을 묻자 “각 분야의 최고 인재들을 골라 그들이 스스로 역량을 발휘하도록 한다”며 “일일이 간섭하는 ‘마이크로 매니지먼트’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했다. 이는 기업 경영에도 고스란히 적용할 수 있는 말인 듯했다.

세일링 요트는 오로지 바람에 따라 돛을 움직이며 바다를 항해한다. 유원지의 레저용 모터보트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이다. 요트는 바람이 잘 불면 시속 20km 정도 속도를 내지만 바람이 없으면 전진하기 어렵다. 푹푹 찌는 더위와 살을 에는 맹렬한 추위에도 세일링은 계속돼야 한다.

일 모스트로 선실 안은 ‘극한의 인생(Life at the extreme)’이라는 이 대회의 수식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닭장같이 다닥다닥 붙은 좁은 이층 침대들과 추위를 이겨내기 위한 침낭, 냉동 음식과 건조 음식을 간단하게 조리할 작은 조리대, 배 안의 유일한 개인 공간이지만 성인 남자 한 명이 앉으면 꽉 차는 화장실….

한밤중 동료들이 교대로 갑판 위에서 항해하는 소리는 선실 안 어둠 속에서는 공포 가득한 굉음으로 들린다고 한다. 한 명이 병에 걸리면 좁은 공간에서 모두 전염되기 일쑤다. 이들은 샤워도 빗물로 한다.

○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되는 요트 세일링

이번에 초대된 기자들은 알리칸테에 도착하기 전에는 저마다 럭셔리한 세일링을 상상했다. 미국, 유럽, 일본 등에서도 요트는 아직 부자들의 전유물 또는 요트에 미친 일부 세일러를 위한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대한 크루저에 탑승해 와인 파티를 즐기는 화려한 요트의 이미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엄청나게 무거운 장비를 다뤄야 하는 세일러들은 체중이 지나치게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하루 5000∼6000Cal의 음식을 먹는다고 한다.

글=알리칸테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디자인=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거친 파도 헤치며 3만7000마일

바다와 나, 하나가 된다

그렇다면 요트 레이서들은 도대체 왜 이처럼 험난한 세일링에 도전하는 것일까. 리드 씨는 말한다.

“내 어머니는 내가 그녀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세일링을 시작했다고 말할 만큼 어려서부터 바다를 즐겼다. 내가 항해하는 모습을 비디오에 담아 요트 문외한들에게 보여주면 그들은 분명 ‘당신은 미쳤다’고 할 것이다. 2년 전 이 대회에선 다른 팀 동료가 사고로 사망하기도 했다. 힘든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 위에 떠 있지 않는 나 자신을 상상하긴 어렵다. 항해 중 겪는 감정의 기복을 이겨내고 평정을 찾는 과정이 뿌듯하다. 자연과 완벽하게 하나가 되는 과정, 그것이 곧 요트 세일링이다.”

리드 씨가 ‘정신적 조언자’라고 치켜세우는 그의 아내와 11세 딸은 그가 바다를 항해할 동안 비행기를 타고 다음 정박지로 이동한다. 리드 씨뿐 아니라 4명의 팀원이 이 같은 형태로 가족과 상봉하기 때문에 이 대회의 주최회사인 ‘볼보’는 올해부터 ‘볼보 스쿨’이란 이름의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요트 레이서 자녀를 위한 일종의 ‘홈스쿨링’을 시작했다.

팀원들에게 ‘긴 여정 동안 남자의 기본적 욕망은 어떻게 해결하는가’라고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이들은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에 동료들과 야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만족하는데, 여정이 길어질수록 ‘수위’가 엄청나게 높아진다”고 웃으며 답했다.

○누구나 함께 즐기는 도시의 요트 축제

알리칸테는 도시 자체가 축제의 현장이었다.

‘볼보 오션 레이스 빌리지’라고 이름 붙여진 알리칸테 항구 주변엔 볼보, 푸마, 에릭슨 등 주최 측과 레이스 참가회사들이 항해 체험기구와 각 회사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관 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세일링 관련 강의와 연극에는 매일 1000명가량의 어린이가 견학하고 있었고, 주말에는 6만여 명의 관람객이 입장했다. 인구 28만 명의 아름다운 지중해 관광도시 알리칸테는 이번 대회를 통해 역동적인 레저도시라는 새로운 색채를 덧입게 됐다.

특히 ‘푸마 시티’라는 이름의 푸마 상점은 300만 kg 무게의 빨간색 이동식 컨테이너 박스로 지어져 눈길을 끌었다. 운동화 포장상자에서 영감을 얻은 감각적인 건물 디자인은 젊은 방문객들을 열광시켜 이 브랜드가 최근 선보인 세일링 라인의 매출을 급격하게 끌어올렸다.

요헨 자이츠 푸마 회장은 “아직까지 요트는 세계적으로 생소한 분야이지만 재미와 모험을 동시에 선사할 새로운 비즈니스 영역”이라며 “우리가 추구하는 세일링은 달콤한 샴페인보다는 좀 더 도전적이고 거친 럼주나 캐주얼한 콜라에 비유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 대회의 진행상황은 볼보 오션 레이스 공식 홈페이지(www.volvooceanrace.org)를 통해 누구나 실시간으로 살펴볼 수 있다. 올해 처음으로 아시아 항로가 신설돼 참가팀들은 조만간 싱가포르와 중국 칭다오 등 ‘미지의 신세계’에 들어설 예정이다.

○미래 산업으로 성장하는 요트 산업

세계적 요트 레이스의 돛에는 럭셔리 브랜드의 로고가 눈에 많이 띈다. 미래 유망 산업인 요트 산업을 통해 자사(自社)의 고객층을 공고히 확충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롤렉스 시드니 호바트 요트 레이스, 루이비통컵, 에르메네질도 제냐 레가타, BMW 세일링컵 등 럭셔리 브랜드들이 여는 요트 레이스는 쟁쟁하다. 프라다는 2000년부터 프라다팀을 아메리카스컵에 참가시켜 회사와 이탈리아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최근에는 루이비통모에에네시(LVMH)그룹이 독일 요트회사 ‘로얄 판 렌트’를 인수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에선 몇 년 전부터 각 지방자치단체의 노력과 주 5일 근무제 정착 등 여가문화의 확산으로 요트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대한요트협회에 따르면 현재 요트 동호인 수는 1만2500명. 특히 6월 경기 화성시 전곡항에서 코리아매치컵 세계요트대회가 성공적으로 치러지면서 국내 해양레저 산업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코리아매치컵의 프로모션을 맡았던 세일 뉴질랜드 인터내셔널의 김동영 대표는 “요트를 정박하고 관리할 수 있는 인프라를 제대로 갖추지 않으면 한국에서 요트문화는 활성화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내 요트 대부분이 일본에서 건너온, 수명이 끝난 중고 요트인 것도 안전상 문제”라고 덧붙였다.

30피트 요트를 구입하려면 1억∼2억 원이 들기 때문에 일반인은 요트 동호회나 요트 클럽에 가입하는 것이 다소 싼 비용으로 세일링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이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 한강 난지지구에 있는 700요트클럽(02-376-5616)은 연회비 418만 원을 내면 세일링 강습을 받을 수 있고, 각종 클럽 시설도 무료로 빌려준다. 비회원이라도 20만∼30만 원을 내면 1시간 반 동안 요트 위에서 낭만을 누릴 수 있어 연인의 데이트 장소나 회사 회식 장소로 인기가 높다. 이밖에 부산요트클럽(busanyacht.com)과 경남 충무 마리나 리조트(055-640-8180) 등에서도 요트를 탈 수 있다.

스페인의 작은 항구도시, 알리칸테에는 크고 작은 요트가 곳곳에 정박해 있고, 주민들이 자녀의 손을 붙잡고 산책하듯 요트를 즐기러 나오고 있었다. 요트가 호화와 사치라는 단단한 껍질을 깨고 자연과 벗 삼는 레저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행복한 표정으로 “바람의 향로는 귀로 듣고 코로 맡는다”던 볼보 오션 레이스 참가자들의 무사 항해를 기원한다.

알리칸테=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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