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7>껍질

  • 입력 2007년 10월 3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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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그러셨듯 손 속에서 손을, 팔다리 속에서 팔다리를, 몸통 속에서 몸통을, 머리털 속에서는 머리털까지 빠뜨리지 않고 하나하나 빼곡하게 빼내어서 그리로 보내고 싶다 온전한 껍질이고 싶다 ―‘껍질’ 중에서》

가을이 들어오고 있다. 정신이 말갛게 갓 솟는 샘물처럼 차가운 계절이다. 한적하고 바람이 지나가는 곳에 의자 하나 놓아두고 싶어진다. 자기를 만나도 좋다. 독왕독래(獨往獨來)도 좋다. 바깥이든 안쪽이든 세계를 좀 더 잘 배알(拜謁)할 수 있는 시간이 가을이다. 배알은 상대를 섬긴다. 자기를 낮추고 맞은편을 높여 애써 찾아가 상면하는 일이 배알이다. 시 쓰는 일도 배알하는 일이다.

정진규 시인은 1939년 기묘생(己卯生)이다. 1960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니 시 쓰는 일을 고집한 게 반백(半百)의 세월이 되었다. 여전히 정진규 시인은 왕성하게 많은 시를 발표하고 세상을 경이롭게 바라본다.

‘아기 천사께서 옹알이를 시작하신 아침 나와 모든 것들의 사이가 한결 좋아졌다 無事通過(무사통과)다 옹알이는 의미도 무의미도 다 통한다 하느님은 그것만 가르쳐 보내셨다 나의 말씀들을 잠시 반납했다’

시 ‘옹알이’에는 경이와 동심이 들어 있다. 배워서 짓는 언어가 아닌, 무엇을 지시하는 것이 아닌 본래 그대로의 마음에서 나온 언어가 아기 천사의 옹알이다. 겉말이 없는 온몸의 언어가 아기의 말이다. 시집 ‘껍질’에 담긴 시들이 아름답고 소중하게 생각되는 이유는 천연(天然)한 시인의 마음이 시편마다 녹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는 것이 있으면 틀어막는다. 새어 나가 줄어드는 것을 놔두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새는 게 상책이라고 말한다. ‘새지 않으면 소리가 되지 않는다 음악이 되지 않는다 노래가 되지 않는다 구멍으로 새어야 소리가 된다 막히면 끝장이다 한 소식도 들을 수 없다’(‘새는 게 上策(상책)이다’ 중에서). 꽉 움켜쥐는 순간 끝장이다. 조금은 내주고 잃어야 중도를 얻는다. 지나치게 팽팽하거나, 지나치게 느슨해도 좋은 소리를 낼 수 없는 거문고 줄처럼.

시인은 작고한 김춘수 시인으로부터 ‘번외(番外)’라는 말을 자주 들었던 모양이다. 시인은 ‘번외’와 ‘등외(等外)’는 큰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시 ‘번외’는 내가 참 좋아하는 시다. ‘大餘(대여·김춘수 시인) 선생은 番外라는 말을 쓰셨다 쥐오줌풀이나 달개비꽃, 어릴 때 본 참빗, 약과틀 같은 그런 것들이 선생의 番外다 혼자서 등 보이고 앉아 있는, 어깨가 좀 시린 그런 番外들, 等外라는 말은 아마 멀리해 하셨을 것이다 함부로 순서에 들지 않는 것이란 말, 番外에는 無量(무량) 자유가 있으나 순서에도 들지 못한다는 말, 等外에는 너무 아픈 폄하가 있다’. 모든 생명과 사물은 낱낱이 고귀한 종자이다. 장자가 말했듯이 모든 생명은 독립적으로 자생자화(自生自化)한다. 칠순의 종심지년(從心之年)을 한 해 앞두고 펴낸 정진규 시인의 시집 ‘껍질’은 이렇게 천연, 새는 것, 자생을 나직한 음성으로 말한다.

빈 들처럼 빈 곳이 생겨나고 있다. 깨를 떨고 난 마른 들깻단 냄새도 좋다. 비워지고 마른 자리가 좋다. 그곳이 침묵의 자리이다. 그곳이 가을이 들어앉는 처소요, 시가 사는 곳이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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