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84년 北, 한국에 수해 구호품 제공

입력 2007-09-29 03:03수정 2009-09-26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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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9월 29일 오전 10시 5분 북한적십자회의 쌀 포대를 가득 실은 트럭들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한국의 수재민을 돕기 위해 북한이 보낸 구호물자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량곡수출회사’라고 선명하게 찍힌 쌀 포대를 주고받는 장면은 분단국 당사자뿐만 아니라 세계인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6·25전쟁 종전 31년 만에 처음 이뤄진 남북 간 물적 교류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경제난에 허덕이는 북한이 형편이 훨씬 나은 이웃에 건넨 구호품이었다. 1983년 기준 국민총생산(GNP)은 한국이 753억 달러, 북한이 145억 달러였다. 5.2 대 1의 격차였다.

북한의 구호물자 제공 논의가 시작된 것은 그해 9월 8일. 북한적십자회는 방송을 통해 쌀 5만 섬, 천(布) 50만 m, 시멘트 10만 t, 기타 의약품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북측은 ‘인도주의와 동포애에 입각한’ 제의라고 했지만 그 진의를 놓고 다양한 해석이 제기됐다. △1년 전 외교사절 17명을 폭사시킨 ‘버마 아웅산 사태’의 나쁜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서다 △한국민의 반공의식을 이완시키려는 선전술이다 △북한 내부 통제용이다 등.

결국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해 실낱 같은 희망이라도 붙잡아야 한다’는 유화론이 ‘정치 선전극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는 강경론을 이겼다. 대한적십자사는 14일 북한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외신들은 “한국의 결정은 역설적으로 북한에 대한 한국의 경제 우위를 보여 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북측은 피해 지역을 직접 방문해 수재민을 위로하고 구호품을 전달하겠다고 주장했지만 남측이 거부했다. 결국 쌀과 천, 의약품은 판문점, 시멘트는 인천항과 동해 북평항을 통해 전달됐다. 물자 인도를 위해 북측 기자 85명을 포함해 1373명이 남한 땅을 밟았다.

그동안 물자교류 제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 제안한 쪽은 북한이었다. 1954년 남일 외무상이 제네바 회의에서 남북한 경제 교류를 위한 위원회 구성을 제안하는 등 북한은 1970년 초반까지 6차례 경제교류 방안을 제시했다. 한국도 1970년대 후반부터 몇 차례 식량 무상원조를 제의했다.

주기보다 받기가 어려워 번번이 무산된 남북 물자교류가 수재 구호물자로 물꼬가 트인 것이다.

지난해 남북한 교역 규모는 134억4900만 달러(약 12조3000억 원). 무상 원조를 거부하며 자존심을 내세웠던 북한은 이제 유통기한이 지난 약이라도 보내 달라고 간청하는 처지가 됐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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