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국수 윤준상 “여전히 바둑을 잘 모르겠다”

  • 입력 2007년 3월 18일 22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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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꾸꺼~ 로꾸꺼~ 말해말~"

통화 대기음에서 슈퍼주니어의 경쾌한 댄스 트로트 멜로디가 흐른다.

"아, 벌써 들어가 계세요? 금방 갈게요."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윤준상 4단은 흰 재킷에 청바지의 깔끔한 옷차림이었다. '국수(國手)'라는 타이틀보다 스무살 청년이란 사실이(정확히 하면 19세 4개월) 먼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오늘은 제가 살게요"

기자가 시킨 오렌지 주스와 본인의 커피값을 선뜻 계산한다. "오~ 국수전 상금(4000만원) 들어왔나 봐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싱긋 웃으며 "한 턱 내야죠"라며 받는다.

1월 9일 국수전 제1국이 열릴 때만 해도 윤 4단의 승리를 점친 이는 거의 없었다. 도전자 결승전에서 박영훈 9단을 2:0 퍼펙트로 물리친 기세로 과연 이 9단에게 몇 판이나 따낼 수 있을지가 관심거리였을 뿐. 그도 그럴 것이 2001년 입단 후 아직까지 타이틀 하나 없었으며 최고 성적도 2002년 LG배 세계기왕전에서 조훈현 9단에 1:2로 패한 도전자 결승전 진출이 고작이었기 때문. 그러나 이같은 예상을 뒤엎고 16일 윤 4단은 약관의 나이에 국내 최고수라는 '국수'에 올랐다.

윤 4단이 바둑을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시절. 명절 때마다 아버지와 친척들이 두는 바둑이 재미있게 보였다. 어떻게든 참견을 하고 싶은데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윤 4단은 바둑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신동 얘기 좀 들었나요?"라고 묻자 손을 내저으며 "아뇨. 그런 말은 전혀… 주위에서는 열심히 노력하면 괜찮을 것 같다는 정도였어요(웃음)"라고 말한다.

그렇게 바둑 학원에서 조금씩 배우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초등학교는 오전 수업만 받았고 중·고등학교 때는 수업을 거의 못 나가고 시험만 봤다고. 그래서 친구들과의 교류가 거의 끊긴 것이 제일 안타깝다고 한다.

"학교에 가서 어울릴 시간이 없으니까 이제는 친구들하고 연락이 거의 끊겼어요. 아쉽죠. 그래서 초등학교 때가 제일 그리워요. 수업 받고 친구들하고 장난치고 참 재미있었는데…."

또래 친구들하고 어울리지 못해 답답하지 않냐고 묻자 친하게 지내는 또래 바둑 기사들이 많아 "할 건 다 하고 지낸다"고 한다. "박영훈 9단 등 85년생 '송아지 3총사'나 이영훈 6단 등 입단 동기들하고 잘 아울리죠. 같이 PC방에 가서 스타크래프트나 카트라이더 같은 게임도 하고 노래방도 가고 그래요."

바둑 기사는 '프리랜서'의 성격이 강하다. 대국이 있는 날 외의 시간은 자유롭다. 그러나 감각 유지를 위해 항상 바둑 공부를 한다. 윤 4단의 경우도 "바둑공부를 주로 한다"고 답한다. "최철한 7단의 연구실에 가서 오전 10시 반부터 오후 5시까지 하는데 중간에 졸리면 쉬고 4시 쯤 되면 연구실 근처 초등학교에 나가서 5:5 축구를 많이 한다"고 말했다.

"축구를 좋아하나봐요?"라고 묻자 눈빛이 반짝거렸다. "어제 박지성 선수 경기 봤어요? 두 골 넣었는데…" 봤노라고 답하자 커피잔을 내려놓고 경기 분석이 한참 이어졌다.

"박지성 선수가 넣어서 봤는데 솔직히 첫 골 호날두의 센터링은 그 전에 공이 골라인에서 조금 벗어나 있었어요. 두 번째 루니가 넣은 골도 감각이 좋았어요. 살짝 올려 찼죠. 그런데 어제 미들스브로의 이동국은 움직임이 영 안 좋더라고요."

대국이 없을 때는 영화나 중국 드라마를 많이 보는데 "김용의 '사조영웅전'을 가장 재미있게 봤다"고 한다.

나이에 비해 워낙 점잖아 보여 "지금까지 '사고 쳤을' 일이 없었겠다"고 하자 "솔직히 있었다"고 털어놨다. 호기심이 발동해 "가장 큰 사고가 뭐였냐"고 묻자 우물쭈물 하다가 "몇 년전에 토요일에 대국도 없고 해서 거실서 컴퓨터 게임을 했는데 그 모습이 안 좋게 보였는지 할아버지께서 꾸중을 하셨다. 못 들은 척 하고 계속 하다 머리를 맞았는데 울컥하는 심정에 큰 소리로 대들었다. 아직까지 죄송한 마음이 남아있다"고 답한다.

윤 4단은 효성이 남다르다. 국수전 타이틀을 차지한 후 소감에서 "17일이 어머니 생일인데 좋은 선물이 될 것 같다"고 답했고, 어머니가 "핸드폰의 신호 대기음인 발라드 노래가 너무 우울하다"고 하자 곧장 슈퍼주니어의 '로꾸꺼'로 바꿨다.

이제 20세. 한국외대 중국어과 재학 중인 윤 4단은 수영, 스쿼시, 중국어 공부 등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해보지 못한 연애를 하고 싶은데 여자를 만날 기회가 없다고…. "그럼 다른 기사들은 어디서 여자친구를 만나죠?"라고 묻자 "소개팅을 많이 하고 이화여대 바둑동아리가 있어 거기에 강연을 나가서 지도하다가 눈이 맞는 경우가 많다"며 "그런데 나를 끼워줄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이제 바둑에 입문한지 12년차. 국내 최고수인 국수의 자리에 올랐지만 여전히 바둑을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아무리 파도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 같아요. 바둑 만화 '고스트 바둑왕'에 나오는 '신의 수'라는 것이 정말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공부를 할 때마다 계속 새로운 수가 보이니 신기하죠."

유성운기자 polari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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