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돼지띠의 해’가 뭐기에… 슈퍼우먼, 그녀들의 속사정

  • 입력 2007년 2월 2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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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8년차 인테리어 디자이너 L 씨는 한창 일할 나이인 29세에 아기를 가졌지만 고민 끝에 낙태수술을 했다. “부서에선 막내였고 그 시점에서 아기를 가지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경력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죠. 남편과 상의해 수술을 했고 후회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결혼 3년째인 L 씨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내심 걱정과 불안을 자제해 오던 시댁과 친정에서 황금돼지띠 해인 올해는 반드시 아이를 가져야 한다며 노골적으로 스트레스를 주기 시작한 것. 급기야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추궁까지 받은 그는 최근 산부인과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불규칙한 일과 작업 현장의 상황이 임신부가 견디기엔 힘들다는 것을 알기에 산부인과로 향하는 그의 머릿속은 더욱 복잡하기만 하다.》

낳으려니… 회사 눈치에… 몸도 안 좋고

안낳자니… 시부모-남편 간절히 바라고

세칭 ‘황금돼지띠 해’를 맞아 입소문을 탄 산부인과는 요즘 예약자 명단이 꽉 찼다.

업무 시간을 쪼개 산부인과 대기실에 들른 이 시대의 슈퍼 우먼들의 머릿속은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다. 시댁 눈치도, 회사 내 입지도, 남편의 성화도 모두 고려한 뾰족한 묘안은 없는데 다가온 2007년 황금돼지띠 해! 출산과 직장을 사이에 두고 고민에 빠진 슈퍼 우먼들의 한숨에 땅이 꺼질 지경이다.

○ 일이냐? 가족이냐? 그것이 문제

연예인 스타일리스트 최민정(32) 씨는 의상을 고르러 다니던 중 갑자기 심한 하혈 증상이 나타나 며칠간 병원 신세를 졌다. 10년 가까이 일해 온 터라 잠시 쉬다 일터가 그리워 복귀했지만 그의 꿈은 황금돼지띠 해에 아이를 낳는 것.

하지만 일을 포기하지 못하는 성격인 데다 가정 일도 꼼꼼히 해내는 억척스러운 그는 남편과 시어머니가 그토록 바라는 아이도, 10년 동안 쌓아온 스타일리스트로서의 경력도 버릴 수가 없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산부인과는 아침부터 대기실이 붐빈다. ‘함춘 여성 클리닉’ 권재희 원장은 “요즘 가장 바쁜 시간이 오전 9시에서 10시다. 출근 전에 진료를 받으려는 직장 여성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시간대이기 때문이다. 대부분 정상 임신보다 (불임) 치료가 필요한 여성들이 많이 찾기 때문에 대기실 분위기는 침울하기까지 하다”고 전한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6년 동안 시부모를 모시고 살아 온 직장인 P(36) 씨에게 동서가 생겼다. 동서는 ‘속도위반’으로 임신한 상태. 결혼 6년 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는 P 씨는 새 가족인 동서의 임신 소식이 반갑지가 않다.

게다가 유방암을 앓고 있는 시어머니와 거동이 불편한 시아버지의 병원비로 빠듯한 살림을 꾸려 가는 그는 아이를 가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최근 산부인과를 찾은 그는 아기가 생겨도 고민이다.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과 아이를 돌봐 줄 가족이 마땅치 않은 사정 때문이다.

○ 슈퍼 우먼들의 자궁 적신호

기혼 커리어 우먼들은 일과 아이라는 두 가지 갈림길에서 고민하느라 정신적으로 힘들다. 하지만 어렵게 찾은 산부인과에서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받는 충격이 더 크다.

직장 경력 9년, 결혼 3년차인 교열 기자 봉정경(34·가명) 씨는 별다른 피임을 하지 않는데도 아기가 생기지 않아 결혼 2년 반이 지난 작년 가을 불임클리닉을 찾았다. 진단 결과는 ‘다낭성 난소 증후군’. 그는 병원 처방에 따라 배란일을 조절하는 약을 먹고 있지만 몇 개월째 실패를 거듭하고 있다.

“한편으론 다행이다 싶어요. 열흘간 이어지는 마감기간 동안 밤 11∼12시에 퇴근하는 불규칙한 직장 생활 때문에 아이가 생기면 직장을 그만둬야 하거든요. 그런데 결혼 때 집을 마련하느라 은행 빚을 많이 져서 맞벌이를 그만두면 안돼요.”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에 불임클리닉을 다니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이가 덜컥 생기면 어쩌나 하는 상반된 고민에 빠져 있는 것이다.

결혼 1년차, 회사 생활 10년차 직장인 김혜민(35) 씨는 최근 이직하면서 심한 우울증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남편은 하루라도 빨리 아이를 갖자고 재촉하지만 우울증 치료약이 독해서 피임을 할 수밖에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얼마 전 자궁의 물혹을 떼어내는 수술도 받았다. 오랜 꿈이었던 직장으로 옮겨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이를 갖자고 입버릇처럼 얘기하는 남편의 소원을 무시하기도 힘든 일이다. 회사 일을 포기하기도, 남편이 원하는 아이를 포기하기도 어렵다.

○ 욕심과 현실 사이의 딜레마

20대 후반∼30대 중반의 커리어 우먼들은 임신이 쉽지만은 않다고 토로한다.

그들에겐 600년 만에 돌아왔다는 ‘황금돼지띠 해’가 반갑지 않다. 경력 10년차의 한 30대 커리어 우먼의 이야기다.

“사회가 원하는 완벽한 여자 역할을 해내기가 힘들어요. 당차게 일도 해내야 하고, 가사 일에도 소홀함이 없어야 하며, 건강한 아이도 낳아야 하고, 또 그 아이를 남에게 뒤지지 않는 똑똑한 아이로 키워야 하죠. 남녀평등, 여권신장 시대라고 하지만 남편이 해 줄 수 있는 건 그저 가사 일과 육아를 분담하는 정도예요. 무엇보다 요즘 젊은 여성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일이에요.”

일 욕심 많고 능력 있는 슈퍼 우먼들이 늘어날수록 녹록하지 않은 현실은 그들에게 풀 수 없는 딜레마다.

이정금 사외기자 fash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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