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보는 미래-미래학 20선]<12>인류의 미래사

  • 입력 2007년 1월 17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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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대개 한 종류의 일에 5년 정도 종사한 다음 학교에서 재훈련을 받고 또 다른 일자리에서 몇 년 근무한 뒤 두 가지 일을 번갈아 하며 자투리 시간에 세 번째 기술을 익히는 방식으로 살아갔단다.》

때는 서기 2200년. 지구축제일을 맞아 피터 젠슨은 열 살짜리 손녀 잉그리드 젠슨에게 홀로필름을 선물로 준다. 손녀는 그 필름 내용을 글로 옮겼으니, 바로 1995년부터 2200년에 이르는 젠슨 가문의 역사이자 인류의 역사다. 이 인류의 미래사를 ‘위조해 낸’ 저자 W 워런 와거 씨는 뉴욕주립대 교수로 재직한 역사학자다. 저자의 이런 이력은 여타의 미래학 도서들과 이 책을 구별 지어 주는 특징이기도 하다.

미래학이라고 하면 과학기술의 발전상에 바탕을 두어 미래사회를 예측하거나, 사회 문화 경제 트렌드의 변화를 전망하는 것을 떠올리게 되지만, 이 책은 사상 경제 문화 정치 사회 분야의 미래상을 엮은 일종의 종합사이자 전체사에 가깝다. 편지, 칼럼, 공문서, 일기 등의 ‘미래 사료(史料)’를 멋지게 위조해 내 개인의 일상과 감정의 영역까지 세밀하게 구성해 낸 솜씨가 놀랍다.

이 범상치 않은 역사학 실험실 속 지구의 역사는 극단적 자본주의 체제가 전 세계를 석권한 1995년부터, 인류를 파국으로 몰아넣은 2044년의 제3차 세계대전, 그 뒤를 이은 전 지구적 사회주의 체제의 탄생과 붕괴, 아나키즘 공동체 사회가 된 2200년으로 이어진다. 가장 가까운 미래의 모습은 끔찍하다. 중산층이 완전히 무너지고 양극화가 심화되며 12개의 초거대기업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국가를 뛰어넘는 영향력을 휘두른다. 급기야 2038년부터 2043년 사이에 전 지구적 대공황이 발생하고 대부분 국가의 실업률은 50%에 달한다.

지구국가연합에서 탈퇴한 미국을 지구통합사령부가 공격함으로써 3차대전이 일어나 1년 내에 72억 명이 사망한다. 전후에는 세계연방이 종족주의, 자본주의, 성차별주의 근절을 목표로 통치하지만 2147년 선거에서 ‘작은당’이 제1당이 됨으로써 세계연방체제는 무너진다. 이때 부활한 올림픽 경기가 ‘국가대표선수’들의 경기가 아니라 개인 대 개인의 놀이인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인류는 정부 없는 지배의 꿈을 실현하려 한다.

저자가 그린 지구 200년의 미래사를 요약하면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대화되어 3차대전이 일어나고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서며 결국 아나키즘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자본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이라는 ‘서양 근대의 기획’을 주제 삼아 행한 거대한 사고 실험(thought experiment)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인간의 정치적 사회적 상상력은 오늘날 우리가 근대라 일컫는 대략 18세기 이후부터 정지되어 있는 셈인가?

잉그리드 젠슨의 목소리를 빌린 저자의 말이 긴 여운을 남긴다. ‘하지만 이 점 또한 잊으면 안 되겠지요. 우리의 이 모든 노력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아니면 공동체주의를 이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세계 질서를 위해 살지 않습니다. 세계 질서가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요. 세계 질서는 이 가없는 존재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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