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다산 정약용 서거 170주년… 본보와 특별한 인연

  • 입력 2006년 4월 7일 03시 04분


“‘다산 정약용’은 일제강점기의 식민통치가 더욱 극악해지던 1930년대 중반 민족정신을 소생시킬 하나의 키워드였습니다. 민족지도자들은 1936년 다산 서거 100주년을 앞두고 여유당전서 영인본 간행, 신문 기고 등을 통해 다산 붐을 일으켰습니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1762∼1836)의 서거 170주년(7일)을 앞두고 6일 만난 박석무(朴錫武)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다산학의 뿌리가 어디 있는지 알아야 다산 정신을 제대로 이어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일제강점 당시 민족지도자들은 민족의 실력을 키워야 독립이 가능하다고 보고 실력 양성의 정신적 기초로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을 삼았다는 것. 정인보(鄭寅普) 안재홍(安在鴻) 송진우(宋鎭禹) 윤치호(尹致昊) 김성수(金性洙) 한용운(韓龍雲) 등 44인은 1935년 7월 ‘다산 서거 100주년 기념회’를 발기해 다산 정신 확산에 나섰다. 당시 동아일보는 ‘조선사상 태양적 존재인 다산 선생의 위업을 추모하기 위하여’라며 기념회 발기 취지를 소개했으며 ‘정다산 선생 서세(逝世) 100년을 기념하면서’라는 사설을 싣기도 했다.

박 이사장은 “정인보는 동아일보에 ‘유일한 정법가(政法家) 정다산 선생 서론’을 6회에 걸쳐 연재했으며 조선일보도 다산 관련 글을 싣는 등 신문들이 적극적으로 다산 정신 확산에 나섰다”고 말했다.

그 같은 분위기 속에서 여유당전서의 영인본 간행 작업이 진행됐다. 막대한 간행 비용 마련을 위해 동아일보 등 신문사들이 모금 운동을 펼쳤으나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상황이어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박 이사장은 설명했다. 그러다 결국 ‘모 인사의 자금 지원으로’ 1939년 여유당전서 영인본이 완간됐다. 박 이사장은 “당시 자금을 댄 모 인사가 동아일보 창업주인 인촌 김성수 선생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라며 “백낙준(白樂濬)의 글에도 비슷한 언급이 있다”고 밝혔다.

다산연구소는 7일 오전 10시 반 다산의 묘소가 있는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묘제를 올린 뒤 강연회와 국악 공연 등을 펼친다. 02-545-1692, www.edasan.org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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