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藏而不藏)’ 생명력을 발휘했고,
그가 예견한 것처럼 몇백 년 후 빛을 발하게 됐습니다.”》
최초의 근대적 아시아인으로 꼽히는 중국 명말(明末)의 사상가 탁오 이지(卓吾 李贄·1527∼1602)에 대한 국내 학자의 첫 평전이 나왔다. 30여 년간 이탁오 사상을 연구해 온 신용철(69) 경희대 명예교수가 펴낸 ‘공자의 천하, 중국을 뒤흔든 자유인 이탁오’(지식산업사)이다.
신 교수는 1970년대 독일 하이델베르크대에서 이탁오에 대한 연구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고 국내로 돌아온 뒤 총 25편의 논문을 발표하며 국내의 이탁오 연구를 주도해 왔다.
이탁오는 공자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학적 전통(주자학)에 도전장을 내밀며 개개인의 내면적 깨우침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한 양명학 최대의 이단적 사상가였다.
그는 공자를 ‘구(丘)라는 이름을 가진 일개인’이라는 뜻으로 구을기(丘乙己)라고 부를 정도로 공자를 역사적 존재로 환원시키며 유불선의 통합적 지식을 꿈꿨다. 결국 이 때문에 이단으로 몰려 감옥에 갇혔고 자신의 사상을 꺾지 않기 위해 75세에 자결했다.
그의 책은 청대에도 금서(禁書)였지만 20세기 초 중국의 근대화를 위해 유교적 전통에서 해방돼야 한다며 ‘공자의 상점을 타도하자(打孔家店)’를 외쳤던 5·4신문화운동 때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화혁명 기간에 ‘린뱌오(林彪·임표)와 공자를 비판하자’는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의 상징적 존재로 부각되기도 했다.
“이탁오는 이후 중국뿐 아니라 일본과 서구에서도 아시아 근대 사상의 시원으로 연구됩니다. 이탁오는 사상의 자유와 남녀평등의 주창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를 탄핵한 글의 3분의 2는 그의 여성관을 공격한 것이었습니다.”
국내의 이탁오 연구는 최근에야 본격화되고 있다. 2004년 이탁오의 ‘분서’(한길사)가 처음 완역됐고 2005년 중국학자들이 쓴 ‘이탁오 평전’(돌베개)이 번역됐다.
신 교수는 이탁오에 대한 책을 내려고 30여 년을 별렀지만 쓸 수 없었다고 한다.
“이탁오의 사상을 하나로 포괄할 수 있는 개념을 못 찾았기 때문입니다. 이제야 찾아낸 그것은 모두를 포용하면서도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은 ‘자유인’이었습니다. 그가 유불선의 모든 사상을 포용하고 긍정했음에도 당대의 모든 사상가로부터 배격된 것은 오로지 개인과 사상의 자유에 장애가 되는 것을 맹렬히 미워했기 때문입니다.”
신 교수의 책은 중국뿐 아니라 일본과 서구의 이탁오 연구성과를 골고루 반영했다. 그러나 전문적 학술서가 아니라 대중적 교양서를 지향했다. 16세기 한중일의 선각자적 동시대인으로 이탁오와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2∼1616)를 공동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일본 만화의 내용까지 담았다.
“세계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탁오는 동양의 마르틴 루터였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주창했던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한 것이 서양 근대화의 뿌리가 됐지만 이탁오의 사상혁명이 좌절된 동양에서는 그것이 한참 뒤지게 된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의 근대화 문제에 천착하기 위해선 이탁오에 대한 투철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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