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뷰]장동건&이정재… 150억짜리 ‘액션태풍’

  • 입력 2005년 12월 8일 02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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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 모두로부터 버림받고 한반도를 향한 원한을 키워가는 해적 두목 씬(장동건)과 그를 제지하기 위해 파견된 해군 특수부대 장교 강세종(이정재)의 운명적인 대결을 담은 영화 ‘태풍’. 사진 제공 CJ엔터테인먼트
남과 북 모두로부터 버림받고 한반도를 향한 원한을 키워가는 해적 두목 씬(장동건)과 그를 제지하기 위해 파견된 해군 특수부대 장교 강세종(이정재)의 운명적인 대결을 담은 영화 ‘태풍’. 사진 제공 CJ엔터테인먼트
대단했다. 그러나 특별하진 못했다.

5일 기자시사회를 통해 처음 공개된 영화 ‘태풍’은 한마디로 이랬다. 역대 한국영화 최고 제작비인 150억 원(순제작비), 관객 800만 명을 기록한 ‘친구’의 곽경택 감독, 한국 제일의 티켓 파워를 가진 배우 장동건, 한국 러시아 태국을 종횡무진 하는 스케일, 남북 분단과 이데올로기에 안타깝게 희생된 개인…. 한국형 블록버스터로는 나무랄 데 없는 요소들을 갖춘 ‘태풍’은 진정 연말 극장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을 만큼 A급 태풍의 무지막지한 기세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 영화에는 산들바람이 부족했다.

동남아를 주름잡는 북한 태생 해적 두목 씬(장동건)에겐 어두운 기억이 있다. 중국으로 탈출한 뒤 남한으로 귀순하려 했던 씬의 가족은 한국정부로부터 외면당하고 북으로 돌려보내진 뒤 몰살당했던 것이다. 복수의 칼을 갈던 씬은 핵 장비를 실은 미국 배를 탈취한 뒤 한반도를 향한 테러를 도모한다. 한편 씬을 막기 위해 파견된 해군 특수부대 대위 강세종(이정재)은 씬이 어릴 적 헤어진 누나 최명주(이미연)의 신병을 러시아에서 확보하고 씬을 기다린다.

‘태풍’에는 이국(異國)의 공기가 살아 꿈틀거린다. 태국 정글의 작렬하는 태양, 러시아 도시 우수리스크의 음울한 잿빛 풍경은 인물이 짊어진 사연과 찐득하게 접착되면서 화면에 스산한 숨결을 불어 넣는다. 막대한 제작비를 들여 해외 로케이션을 감행하고도 오히려 이국이 갖는 낯설음의 무게에 압사되기 일쑤였던 한국영화들의 한계를 뛰어넘을 만큼 ‘태풍’의 에너지는 폭발적이다.

이 영화는 ‘외국어’의 벽도 뛰어넘는다. 씬, 아니 배우 장동건은 자신이 구사하는 외국어에 가위눌리지 않고 오히려 태국어와 러시아어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집어삼킴으로써 질식될 듯한 살기를 뿜어낸다. ‘씬’이란 이름은 본명인 ‘최명신’의 마지막 글자에서 비롯됐지만 혹여 분단된 한반도의 ‘원죄(Sin)’를 은유하는 중의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장동건, 아니 씬의 눈빛은 원한의 기억으로 타오른다. 끔찍한 폐쇄성과 어두운 카리스마라는 점에서 ‘지옥의 묵시록’의 커츠 대령을 연상케 하는 인물 씬은 관객의 연민과 두려움을 동시에 자극한다. 한편 이정재는 자신의 ‘발음’ 콤플렉스를 통쾌하게 극복해 중후하고 상념에 찬 내레이션을 들려줌으로써 강세종이란 인물이 갖는 화석화된 캐릭터와 대사(“자랑스러운 대한의 아들” 운운하는)에 입체감을 불어넣는다.

‘태풍’은 시작부터 숨 막힐 듯한 액션을 과시하면서 이야기를 속도감 있게 밀어붙인다. 자동차 추격, 피가 튀는 총격, 비바람 속을 돌진하는 헬기, 그림자처럼 접근해 오는 잠수함 등 영화는 육해공을 막론한 블록버스터로서의 기본 메뉴를 구토처럼 쏟아낸다.

하지만 영화는 정작 결정적인 비등점에 이르러 끓어 넘치지 못한다. 씬과 명주 남매가 20년 만에 상봉하는 장면은 슬프지만 가슴을 후벼 파진 못하고, 씬과 세종이 단도를 든 채 목숨 건 대결을 펼치는 클라이맥스는 강렬하지만 핵폭발엔 이르지 못한다. 두 남자의 대결 에너지라는 대동맥을 통해 수컷의 뜨겁고 거친 피를 펌프질 하는 데 성공한 이 영화가 막상 인물의 감정선을 주도면밀하게 끌고 가기 위한 감성의 모세혈관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한 탓으로 보인다.

‘쉬리’ ‘공동경비구역 JSA’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에 비해 분단과 국제정세를 보는 시각이 투박해 보이는 것도, 씬의 대사들이 내밀하기보단 웅변처럼 다가오는 것도, 장동건을 더 많이 ‘써먹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허기진 느낌도 이 지점에서 파생되는 문제들이다. 14일 개봉. 15세 이상.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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