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ma]영화 ‘랜드 오브 플렌티’

  • 입력 2005년 9월 23일 03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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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이후 미국인들이 느끼는 혼란을 다룬 ‘랜드 오브 플렌티’ 사진 제공 스폰지
9·11 이후 미국인들이 느끼는 혼란을 다룬 ‘랜드 오브 플렌티’ 사진 제공 스폰지
요즘 미국의 공항이나 기차역에서 가장 위험시되는 것은 주인 없이 놓인 가방. 이를 발견즉시 신고하라는 안내문이 여기저기에 붙어있다. 폭발물 테러를 우려해서다.

9·11테러 이후 미국인들이 느끼는 불안과 혼란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최근 서울 시네큐브에서 개봉된 빔 벤더스 감독의 ‘랜드 오브 플렌티(Land of Plenty)’는 바로 이 같은 미국인들의 집단 무의식에 담담하게 카메라 렌즈를 들이댄 영화다.

베트남전 참전용사인 폴(존 딜)은 생활도 팽개친 채 ‘내 조국은 내가 지킨다’는 신념으로 국가안보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카메라와 녹음장비를 장착한 차를 타고 다니며 잠재적(?) 테러 용의자들을 24시간 추적하는 것이 그의 일과. 주인 없이 버려진 가방이나, 아랍계 사람들이 그에게 모두 요주의 대상이다. 미국의 운명은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믿음으로 그는 쓰레기통을 뒤지고 남의 대화를 녹음하고 미행을 일삼는다.

맹목적 애국심으로 이성을 잃은 그에게 유일한 혈육인 조카딸 라나(미첼 윌리엄스)가 찾아온다. 선교사 부모를 따라 아프리카 등지에서 성장한 라나는 인간의 선한 의지를 믿는 이상주의자. 9·11 당시 기뻐 열광하는 아랍인들을 보며 그는 도대체 내 조국이 어떤 나라이기에 증오의 대상이 됐는지 헤아려보고자 한다.

더불어 라나는 빈민구제소에 일하면서 삼촌의 닫힌 마음을 열어보려고 애쓴다. 폴과 라나는 한 아랍인의 죽음을 계기로 함께 길을 떠난다.

폴은 상처받은 미국을 상징한다. 빔 벤더스 감독은 상처받은 미국에 대해 연민의 시선을 보내면서도 뼈아픈 한마디를 잊지 않는다.

“그들(9·11 희생자들)은 자신들의 이름 아래 더 이상의 희생을 바라지 않는다.”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내세우며 또 다른 희생을 야기하는 전쟁을 일으킨 미국에 보내는 메시지다.

코믹과 애잔한 분위기를 결합한 영화는 심한 감정의 굴곡 없이 잔잔하게 흘러간다. 특수장비를 갖추고 테러용의자의 소굴(?)로 잠입한 폴이 발견한 것은 병석에 누운 할머니. 고장난 리모컨 때문에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연설하는 재미없는 방송만 계속 보고 있는 할머니는 그에게 다 가져가되 그 대신 채널 좀 바꿔달라고 요청한다. 폴이 TV를 쾅 내려치는 모습에서 마치 부시의 머리를 후려치는 듯한 이미지가 연상된다.

‘피해자 콤플렉스’로 똘똘 뭉친 서글픈 미국을 다시 보게 하는 영화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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