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친 분만 부자되시오”…사뿐사뿐 어름산이

  • 입력 2005년 9월 18일 09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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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m 외줄. 소녀 어름산이가 줄을 탄다. 발 끝에 혼신의 힘을 모아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다. 떨어질 듯 고의로 실수를 해 보이며 아슬아슬 비틀비틀 건너간다. 돌아오는 길은 사뿐사뿐, 걷는 폼이 발레라도 하는 듯 하다. 부채 하나로 겨우 중심을 잡더니 이내 반동으로 새처럼 솟구쳐 오른다. 구경꾼들 사이에서 ‘어이쿠 어이쿠, 저런 저런’ 소리가 절로 나온다.

사뿐사뿐 줄타는 어름산이 관객들과 호흡척척

경기 안성시 보개면 복평리 안성 남사당 전수관에 마련된 상설공연장. 여기서는 매주 토요일 옛 남사당의 ‘여섯마당놀이’가 안성시립 ‘바우덕이풍물단’에 의해 고스란히 재현된다.

여성마당놀이의 백미는 ‘어름’. 어름이란 외줄타기의 남사당 용어로서 ‘얼음 위를 조심스럽게 걷듯이 어렵다’는 뜻이다. 줄타기 최고수는 ‘어름산이’라 부른다. ‘산이’는 사람과 신의 중간이라는 뜻이다.

바우덕이풍물단의 외줄타기 일인자 권원태(38·안성시립남사당 상임단원) 씨의 제자 박지나(18), 서주향(14) 양은 공연 때마다 차례로 줄 위에 오른다. 이들은 전국에 7명밖에 없다는 어름산이 중 2명이다.

먼저 여중생 주향이가 줄을 탄다. 패랭이를 쓰고 흰 저고리 위에 붉은 배자를 입고, 한 손엔 부채를 든 채 발랄하게 등장한다. 중간에 두어 번 비틀거리는 통에 구경꾼의 마음을 졸이게도 하지만 이내 다시 힘차게 줄을 튕겨 솟구쳐 오르고 한발 뛰기로 건너가는 등 큰 실수 없이 재주를 펼친다.

“이제 박지나 얼음산이가 나옵니다. 저보다 나이도 많고 미모도 떨어지지만 큰 박수를 쳐 주십시오.”

주향이의 소개에 안성남사당패의 ‘마스코트’ 박지나(18) 양이 패랭이를 쓰고 파란 배자를 입은 채 부채를 펄럭이며 씩씩하게 줄 위에 등장한다. 지나는 19세기 최고의 남사당 ‘바우덕이(본명 김암덕)’의 화신이라는 칭송을 듣는 여고생 어름산이다.

“이놈의 줄이 성질이 지랄 같아서 박수 소리가 죽은 놈 방귀소리보다 못하게 나오니, 심통이 났네. 부디 박수를 쳐주신 분들만 부자 되십시오.”

여고생이라고 믿겨지지 않을 만큼 천연덕스러운 입담이 농익는다. 관객들도 손뼉을 치며 웃느라 자지러진다. 지나 양은 가랑이 사이로 줄을 타며 줄의 탄력을 이용하여 높이뛰기를 계속한다. 줄 위에서 허공으로 쉴 새 없이 솟구친다.

“내가 가시나(여자)이기 망정이지, 저 놈처럼 머시마(남자)였으면 지금 거시기가 머시기가 됐을 거시여.”

지나 양이 기특하다고 생각한 관객들은 쌈짓돈을 꺼낸다. 관람객들이 너도나도 자기 아이 손에 만원씩 쥐어서 무대로 내보낸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을 날리며 떠나를 가네/…’

이날 공연하는 지나 양의 모습은 안성 민요 속에 등장하는 여 꼭두쇠 바우덕이 그대로인 듯 하다.

돈을 받아 들고 안 주머니고 뒷주머니고 쑤셔 넣는데, 간혹 줄 아래로 떨어진 1만 원짜리들은 북을 치는 매호씨(재담을 주고 받는 상대)의 차지가 되기도 한다.

“아니, 이놈아 내 돈은 왜 가져가.”

“줍는 게 임자야.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내가 먹는다는 말도 못 들었냐.”

관객들은 또 한번 자지러지면서 더 많은 후원금을 내 놓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요,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이다. 공연 자체는 무료지만 이렇게 모인 돈은 수십만 원은 족히 된다고.

“오늘은 요~쪽이 물이 좋네. 저쪽 관람객 분들은 눈 꼭 감고 잘 보시길 바랍니다.”

지나 양은 돈을 낸 관객들을 향해 인사를 하고 활짝 웃으며 줄 위에서 엉덩이 반동으로 90도씩 360도 회전하는 거중돌기를 한다.

“먹고 살라고 이 지랄이여, 먹고 살라고.”

“오늘 방송국 카메라맨들도 내 궁둥짝 훑고 잘~ 따라다닌다. 먹고 살려고 니들도 고생헌다.”

끝 공연 후 매호씨의 ‘앵콜 재촉’에 못이기는 척 하던 지나 양은 거중돌기와 코차기(줄의 반동을 이용해 솟구쳐 올라 양발로 코를 차는 동작)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러더니 무릎걸음으로 종종거리며 되돌아 왔다. 박수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어름에 이어 버나잡이(접시돌리기), 풍물을 끝으로 6마당은 끝이 난다. 30여명이 꽹과리와 장구, 북, 태평소를 연주하며 무동놀이 등 마지막 공연을 신명나게 한 판 펼친다.

관객도 남사당도 함께 어우러져 풍물 리듬에 맞춰 덩실덩실 한바탕 춤을 춘다. 가을밤은 그렇게 깊어 간다.

▷안성 남사당 토요상설 공연

서울에서 1시간 거리인 안성 보개면 복평리 34 남사당 전수관, 안성남사당패는 지난 4월 2일부터 오는 10월 29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후 6시 30분에 19세기 남사당 바우덕이를 재현하는 공연을 펼치고 있다. 공연은 꽹과리 소리를 시작으로 2시간 30분간 진행되며, 살판(땅재주놀이), 덧뵈기(탈놀이), 버나잡이(접시돌리기), 덜미(인형극), 어름(줄타기), 풍물 등 6마당이 펼쳐진다. 이 공연은 10월 5일부터 9일까지 안성시 종합운동장과 시내 일원에서 개최되는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 축제’ 기간에도 계속된다. 문의 031-678-2064, 2473(안성시청문화공보실 예술진흥담당)

최현정 동아닷컴 기자 phoeb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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