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칠레 여인의 고단한 삶…‘세피아빛 초상’

  • 입력 2005년 8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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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여성들의 비극적이면서도, 운명을 극복하는 삶을 그린 3부작을 마무리한 이사벨 아옌데. 동아일보 자료 사진
칠레 여성들의 비극적이면서도, 운명을 극복하는 삶을 그린 3부작을 마무리한 이사벨 아옌데. 동아일보 자료 사진
◇세피아빛 초상/이사벨 아옌데 지음·조영실 옮김/400쪽·1만 원·민음사

이사벨 아옌데는 누에고치가 실을 잣듯이 이야기를 뽑아낸다. 그녀의 펜 끝에서 굼실굼실 빠져나온 이야기들은 마치 갖은 빛깔의 실로 뜬 자수처럼 꼼꼼하면서도 아름답다. 분방하면서도 현실적이다. ‘세피아빛 초상’(2000년)이 그러하다. 이 소설은 칠레 근대 여성들의 삶을 다룬 아옌데의 전작 ‘영혼의 집’(1982년) ‘운명의 딸’(1999년)에 이은 ‘아옌데 여성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이다. ‘영혼의 집’의 클라라가 ‘운명의 딸’의 엘리사 소머스를 낳고, 그 엘리사 소머스가 ‘세피아빛 초상’의 아우로라를 낳은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칠레 이민의 후손 아우로라는 어릴 적부터 알 수 없는 악몽에 시달리다가 디에고라는 남자를 만나 가족과 떨어진 농촌으로 이주한다. 전원이 주는 안식도 잠시, 아우로라는 또다시 악몽에 시달리고 어느 날 남편이 젊은 여성과 바람나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아우로라는 남편을 뿌리치지 못한 채 사진에 빠져든다. 제목에 쓰인 ‘세피아’란 오징어 먹물로 만든 갈색 안료를 가리키는데 아우로라가 자신의 초상을 빛깔로 표현하자면 그런 색일 것이라고 말한 데서 나왔다.

이 작품은 북미의 샌프란시스코에서 남미의 발파라이소를 오가는 화물 증기선에 실린 풍성한 과일과 곡물들처럼 줄거리 몇 줄로는 결코 요약할 수 없는 풍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숱한 이민자들이 몰려들어 인종의 세계화가 이뤄졌던 19세기 후반의 샌프란시스코는 인종의 차별, 그리고 그걸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가 흘러넘쳤던 도시였다. 캘리포니아의 골드러시, 차이나타운의 아동 매춘, 칠레의 신흥 부르주아와 농촌 지주들 간의 갈등들로 파란만장한 칠레 이주민의 역사가 되살아난다.

이 같은 이야기의 잔치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아우로라를 보살피는 할머니 파울리나다. 살이 접히는 몸매지만 가끔 아가씨처럼 꽃무늬 옷을 차려입는 신흥 부르주아 파울리나는 미국 곳곳의 부동산에 투자하고, 곡물 교역으로 돈을 벌어들이는 자신만만한 여성이다. 파울리나의 이야기를 읽으면 인생은 심각하지 않은 체스게임 같다.

아옌데라는 이름을 들으면 사람들은 1973년 군부 쿠데타로 숨을 거둔 비운의 칠레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를 떠올린다. 이사벨은 그 아옌데의 5촌 조카다. 하지만 ‘아옌데 여성 3부작’이 거둬들인 명성으로 이제 아옌데라고 하면 이사벨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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