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사라진 두장’ 미스터리 풀려

  • 입력 2005년 6월 15일 03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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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본’의 첫 번째 장(왼쪽)과 다섯 번째 장. 다섯 번째 장 등 대부분의 낱장 뒷면엔 한글 글씨가 빽빽하게 쓰여져 있다. 김주원 서울대 교수는 뒷면의 글씨가 18세기 이후 ‘십구사략언해’의 내용을 옮겨 적은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첫 번째 두번째 장은 뜯겨져 나갔으며 현재의 낱장은 1940년경 보수해 넣은 것이다. 사진 제공 문화재청
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본’의 첫 번째 장(왼쪽)과 다섯 번째 장. 다섯 번째 장 등 대부분의 낱장 뒷면엔 한글 글씨가 빽빽하게 쓰여져 있다. 김주원 서울대 교수는 뒷면의 글씨가 18세기 이후 ‘십구사략언해’의 내용을 옮겨 적은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첫 번째 두번째 장은 뜯겨져 나갔으며 현재의 낱장은 1940년경 보수해 넣은 것이다. 사진 제공 문화재청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의 맨 앞 두 장이 떨어져 나간 것은 조선 연산군(재위 1495∼1506) 때가 아니라 18세기 이후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종이 뒷면에 쓰여진 글은 18세기 전후에 한글로 ‘십구사략언해(十九史略諺解)’를 옮겨 적은 것이다.”

국보 70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훈민정음 해례본’(1446)에 얽힌 궁금증들이 풀리게 됐다.

맨 앞의 두 장이 언제 떨어져 나갔는지? 낱장 뒷면에 빽빽하게 적혀 있는 한글은 무슨 내용인지? 국어학자 및 문화재 전문가들이 늘 궁금해했던 내용들이다.

김주원(金周源·49·언어학) 서울대 교수는 이달 말 발표 예정인 ‘훈민정음 해례본의 뒷면 글 내용과 그에 관련된 몇 문제’란 논문에서 이 같은 궁금증을 풀어냈다. 이 논문은 국어학회 학술지 ‘국어학’ 45집에 게재할 예정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엔 훈민정음의 창제 동기와 의미, 용법 등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국보 70호 해례본은 세종 때 목판으로 찍어낸 해례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

해례본은 1940년 여름, 경북 안동시의 한 고택에서 표지와 맨 앞의 두 장이 떨어진 채로 발견됐다. 해례본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자 소장자 측은 ‘세종실록(世宗實錄)’ ‘월인석보(月印釋譜)’에 나오는 세종의 서문(해례본 앞 쪽의 내용)을 옮겨 쓴 뒤 그 종이를 합쳐 다시 제본했다. 그 해 문화재 수집가였던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이 이를 구입했고 지금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이번 연구는 해례본 낱장의 뒷면에 써있는 글씨를 해독하는 데서 시작됐다. 뒷면 글씨가 선명히 비치는 사진을 접한 김 교수는 사진편집기(포토숍)로 사진 속 글씨를 뒤집어 하나하나 읽어 나갔다.

그 결과 ‘십구사략언해’ 권1의 내용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십구사략언해’는 중국 명대의 왕실 자제 교육서 ‘십구사략통고’를 한글로 풀어 쓴 것. 김 교수는 옮겨 적은 글의 구개음화 등 각종 문법으로 보아 18세기 전후에 쓰여진 것으로 판단했다.

이어 해례본 맨 앞의 두 장이 떨어져 나간 시기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가 주목한 대목은 세 번째 장 뒷면의 글씨 내용이 ‘십구사략언해’ 권1의 3장부터 시작된다는 점.

김 교수의 설명. “누군가 권1의 내용을 옮겨 적었다면 3장이 아니라 1장부터 시작하는 것이 상식이다. 권1의 1, 2장은 해례본의 맨 앞 두 장의 뒷면에 적혀 있었을 것이다. 분량상으로도 일치한다.”

해례본의 두 장이 떨어져 나간 것은 옮겨 적은 이후, 즉 18세기 후라는 말이 된다. 학계는 한글 사용을 탄압했던 연산군 때에 맨 앞의 두 장이 사라졌을 것으로 막연히 추정해 왔다. 이번 연구를 통해 그동안의 비과학적인 추론을 바로잡을 수 있게 됐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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