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춤’… 눈이 부시도록 솟구치려는 날갯짓

  • 입력 2005년 5월 20일 16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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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형준. 그는 어디서든지 빛을 먼저 바라본다. 새 시집 ‘춤’의 맨 앞 작품은 ‘빛의 소묘’, 맨 끝 작품은 ‘오전, 창에 번지는 빛’이다. 사진 제공 창비
시인 박형준. 그는 어디서든지 빛을 먼저 바라본다. 새 시집 ‘춤’의 맨 앞 작품은 ‘빛의 소묘’, 맨 끝 작품은 ‘오전, 창에 번지는 빛’이다. 사진 제공 창비
◇춤/박형준 지음/108쪽·6000원·창비

시인 박형준은 전북 정읍시에서 태어나 올해 마흔 살이 되었다. 그가 네 번째 펴낸 시집 ‘춤’은 솟구쳐 날아오르려는 날갯짓을 가장 눈부신 이미지로 던지고 있다. 그것은 저 높은 아름다움 속에 파묻히기 위해 아무런 두려움 없이 몸을 던지는 비상(飛上)이다.

지금의 절반도 안 된 나이에 시인이 되기로 한 그의 고민은 과연 눈앞의 저 ‘가파른 얼음 계곡으로 가야만 하나’ 하는 것이었다.

‘내 생이 저렇게 일시에 얼어붙을 수 있다면/나는 어떤 무늬를 내부에 간직할 수 있을까/(중략)/나는 얼음 계곡을 올라가며 정을 박고 싶었다/날개들을 캐내고 싶었다/山頂(산정)의 얼음 묘지에 이르러/나는 얼음 속에 내 삶을 결박하려는 꿈을 꾸었다’(‘얼음 계곡’ 일부)

그는 투명한 언어의 묘지 속에서 영원히 결빙되려고 마음을 굳히자 눈앞의 모든 구차스러운 일들이 아름다워 보이는 이상한 경험을 한다. 물이 새는 서울의 한 단칸방에서 빗소리에 맞춰 노래하는 한 청년의 즐거운 혼잣말이 어떠한지 귀를 기울여 보라.

‘비바람에 창밖 토란이/코끼리 귀 같은 잎을 펄럭이네/토란에 떨어지는 빗방울이/꿈속까지 미끄러져 오네/창을 열어두고 잠이 든 어느 여름이었네/토란 뿌리까지 내리는 비가 방바닥에 스며 솟구친 것이었네/(중략)/부글부글 솟아나는 물들이 빛나네’(‘물들이 빛나네’ 일부)

그러나 얼음산(山)을 오르는 일은 얼마나 위태로운가. 그는 차들이 살처럼 지나가는 서울 연희동 지하차도 위의 풀밭에서 죽은 구관조를 발견한다. 단 한번도 제대로 날지 못한 채 말소리 흉내만 내다 숨진 가여운 새다.

‘구관조는 죽어서야 비로소 새장 밖으로 나온 모양이다/버려진 속은 달빛을 받아 흰 날개들이 무수히 태어나는 것처럼 보인다/내장을 둥글게 파먹고 있는 구더기 떼가/구관조에게는 빛이다’(‘구관조’ 일부)

세상의 살풍경에 고개 돌리려 했더니 어느 결엔가 자기 배부터 부패하고 있음을 본 ‘나이 든 청년’의 씁쓸함이 이 뛰어난 한 장면에 선명하게 담겨졌다.

이 시집에는 숱한 꽃들과 동물들이 이름 불려 나온다. 해당화 산수유 진달래 같은 꽃들, 오리 황새 백조 같은 새들, 송아지 나귀 사슴벌레 같은 것들이다.

‘햇빛 너무 환해/눈밭을 헤치고 나온/사슴벌레 한 마리/두 뿔로/공중에 뻗은 나뭇가지 끝/무지개 치받는다’(‘동면’ 일부)

시인은 자기 삶 속에 꽃들과 동물들이 함께 살던 시절로부터, 그 시절을 잊지 않는 기억의 힘으로부터 생명력을 얻는 것 같다. 그는 ‘엄마소가 난산 끝에 죽은 긴긴 겨울 밤 갓 세상에 나온 송아지 발바닥을 만지며 잠을 청하자 온돌의 불기처럼 부드러웠다’고 시 ‘송아지’에서 떠올린다.

유년의 기억을 들려 주는 그의 시를 읽다 보면 마치 ‘아궁이에서 일렁이는 불길이 금세 얼굴을 적실’ 것만 같다. 그러나 그 부드러운 에너지는 절벽의 꽃을 따는 비행 연습에 나선 어린 송골매를 다룬 타이틀 작품 ‘춤’에서 이렇게 한번, 비범하게 뿜어져 나온다.

‘絶海孤島(절해고도),/내리꽂혔다/솟구친다/근육이 오므라졌다/펴지는 이 쾌감//살을 상상하는 동안/발톱이 점점 바람 무늬로 뒤덮인다/발 아래 움켜쥔 고독이/무게가 느껴지지 않아서/상공에 날개를 활짝 펴고/외침이 절해를 찢어놓으며/서녘 하늘에 날라다 퍼낸 꽃물이 몇 동이일까//천길 절벽 아래/꽃파도가 인다’(‘춤’ 일부)

권기태 기자 kk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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