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침에 만나는 시]전동균/“매화,흰빛들”

  • 입력 2005년 4월 13일 18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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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뜰 매화나무에

어린 하늘이 내려와 배냇짓하며

잘 놀다 간 며칠 뒤

끝이 뾰족한 둥근 잎보다 먼저

꽃이 피어서

몸과 마음이 어긋나는 세상의

길 위로 날아가는

흰빛들

아픈 생의 비밀을 안고 망명하는

망명하다가 끝내 되돌아와

제자리를 지키는

저 흰빛의

저 간절한 향기 속에는

죄짓고 살아온 날들의 차디찬 바람과

지금 막 사랑을 배우는 여자의

덧니 반짝이는 웃음소리,

한밤중에 읽은 책들의

고요한 메아리가

여울물 줄기처럼 찰랑대며 흘러와

흘러와

새끼를 낳듯 몇 알

풋열매들을

드넓은 공중의 빈 가지에 걸어두는 것을

점자처럼 더듬어

읽는다

-시집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세계사)중에서》

‘아픈 생의 비밀을 안고 망명하다가 끝내 되돌아온’ 흰빛들, 도처에 그득하다. 누가 삶으로부터 영원히 망명할 수 있겠는가. 꽃가지 아래로 천 년을 뛰어내린 꽃잎들, 올해도 다시 꽃가지 위에 앉았다. 늘 ‘몸과 마음이 어긋나는 세상’이어도 저 흰빛 그득한 봄날, 꽃잎의 점자를 한나절 읽을 수 있다면야….

반칠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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