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아무도 모른다’vs‘취한 말들…’

  • 입력 2005년 4월 6일 20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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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서 버림받은 4남매가 좁은 아파트에서 벌이는 6개월간의 생존투쟁을 담은 일본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생경한 방식으로 관객을 울린다. 영화 속 남매는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고 방긋방긋 웃기 때문이다. 반면 부모가 죽은 뒤 홀로 남겨진 5남매를 그린 이란 영화 ‘취한 말(馬)들을 위한 시간’(2004년 국내 개봉)은 울부짖는 장남 아윱의 모습을 통해 관객을 아프게 한다.

① ‘취한 말들…’의 점입가경(漸入佳境) 전술

‘엎친 데 덮친 격’의 진수를 보여준다. 신문지로 유리잔을 포장하며 연명하는 아윱의 모습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다음처럼 6단계의 시련이 몰아닥친다.

밀수품을 운반하다 검문에 걸린 남매는 저성장증을 앓는 동생 마디를 데리고 눈보라와 싸우며 귀가한다(1단계)→지뢰를 밟아 죽은 아버지의 시신이 노새에 매달려온다(2단계)→마디는 한 달 내에 수술 받지 못하면 죽는다는 선고를 받는다(3단계)→아윱은 수술비를 벌기 위해 밀수대열에 참여하지만 국경에 매복한 군인들과 마주쳐 혼비백산한다(4단계)→삼촌이 누나를 부잣집에 정략 결혼시키면서 생이별한다.(5단계)→아윱은 마디의 ‘수술비’로 쓸 노새에 마디를 매달고 이라크로 향한다. 군인들을 만나 대열은 흩어지고 추위에 견디도록 술을 먹인 노새는 넘어져서 일어설 줄 모른다(6단계).

② ‘아무도 모른다’의 애이불비(哀而不悲) 전술

아이가 많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이삿짐 가방에 넣어져 아파트로 ‘잠입’하는 아이들의 모습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도 6단계의 시련이 닥친다. 시련이 심화될수록 마치 ‘반작용’처럼 남매는 희망의 표정을 강화시킨다.

엄마가 집을 떠난다. 장남 아키라는 혼자 살림을 꾸려간다(1단계)→아키라는 아버지들(4남매는 모두 아버지가 다르다)을 찾아가 생활비를 구걸한다(2단계)→한 달 만에 돌아온 엄마가 다시 짐을 싸서 나간다.(3단계)→가스도, 물도, 전기도 끊긴다. 아이들은 컵라면 용기에 그림을 그리며 즐거워한다(4단계)→남매는 동네 공원에서 물을 마시거나 씻으면서 산다. 편의점에서 유효기간이 지난 김밥을 받아다가 먹는다. 남매는 흙과 꽃씨를 가져와 베란다에서 꽃을 키운다(5단계)→막내 유키가 의자에 올라갔다가 넘어져서 절명한다. 아키라는 시체를 가방에 담아 들판에 묻는다(6단계).

③ 진정한 ‘눈물의 왕’

‘취한 말들…’은 화끈한 인파이터다. “제발 그만” 할 때까지 관객을 몰아침으로써 불편하게 만든다. 관객은 궁상맞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지긋지긋한 ‘탈출 욕구’를 느낀다. 반면 ‘아무도 모른다’는 의뭉스런 아웃 복서다. 슬픔을 툭툭 던지면서도 하나도 슬프지 않은 척한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영화에 스스로 끼어든다. ‘저 순진한 아이들을 벼랑 끝으로 내몬 게 어쩌면 나 자신(혹은 이 사회)은 아닐까’란 ‘개입 욕구’를 느끼는 것. 대사 비교(표 참조)에서도 나타나듯, 두 영화의 체온은 천양지차다. ‘취한 말들…’은 신세 한탄을 하며 절규하는 뜨거운(hot) 영화인 반면, ‘아무도 모른다’는 자신을 향한 조용한 독백을 곱씹는 차가운(cool) 영화다. 어느 영화의 ‘눈물 제조법’이 더 효과적일까? 정답은 이게 아닐까. ‘취한 말들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취한 말들‥'과 '아무도 모른다'의 가장 슬픈 대사 비교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아무도 모른다
“물이 없으니까 침으로 삼켜.”(저성장증을 앓고 있는 동생 마디에게 아윱이 알약을 먹이면서)
“아저씨, 제발 저희를 두고 가지 마세요.”(밀수꾼 대열이 흩어지자 홀로 남은 아윱이)
“인생이란 놈은 나를 산과 계곡으로 떠돌게 하고 나이 들게 하면서 저승으로 이끄네.”(트럭에 실려 가던 아윱과 동료들이 부르는 노래)
나는 행복해지면 안돼?”(새 남자를 만나 집을 나가려는 엄마가 아이들에게)
“내가 엄마한테 못되게 굴어서 그러나?”(엄마가 한달이 넘게 집에 들어오지 않자 근심하던 딸 교코가)
“유키, 키가 컸구나”(막내 동생 유키의 시체를 가방에 넣으면서 큰오빠 아키라가)

이승재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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