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며 애 키우기, 잃는 것만큼 얻죠”

  • 입력 2005년 1월 6일 18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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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놀아라”“나는 초등학교에서 72명 중 71등 했다. 즐겁게 놀아라.” “네 생일이어서 외할머니 사무실에서 국제전화하는 거야.” ‘일하는 엄마’ 김경오 이보영 씨 모녀가 유학간 상민이에게 전화하고 있다. 권주훈 기자 kjh@donga.com
“재밌게 놀아라”
“나는 초등학교에서 72명 중 71등 했다. 즐겁게 놀아라.” “네 생일이어서 외할머니 사무실에서 국제전화하는 거야.” ‘일하는 엄마’ 김경오 이보영 씨 모녀가 유학간 상민이에게 전화하고 있다. 권주훈 기자 kjh@donga.com
서울 강남구 대치동 주부는 다르다. 아이가 “배고파요” 하면 참살이(웰빙)식단으로 아침을 차린다. 아이가 등교하면 책상에 앉아 아이 교과서로 공부하다 아이가 돌아와 “이건 잘 모르겠어요” 하면 “자, 이건 말이야” 하면서 설명을 시작한다.

압구정동 주부는 바쁘다. 아이가 등교한 뒤 헬스클럽으로 간다. 아이가 돌아와 “이건 좀 어려워요” 하면 “올 게 왔구나. 유학서류 준비해 놓았다. 한국에선 안 되겠다”라고 말한다.

인터넷에 떠도는 우스갯소리의 한 토막.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에 사는 인기 영어강사 이보영 씨(38)는 첫째인 딸 상민이(중학교 1년)를 유학 보냈으니 압구정동 주부에 가깝다고 할까.

이어지는 우스갯소리. 동부이촌동 주부는 ‘선택형’에 관심이 많아 아이에게 아침으로 한식 중식 양식 중에서 골라 배달시켜준 뒤 부동산을 보러 나간다. 공부에 대해 묻는 아이에게는 “대충해라. 네 앞으로 건물 하나 봐 놓았다. 그거면 너 평생 먹고살 거다”라고 대답한다.

이 씨는 둘 다 아니다. 아침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출근하고 아이들 공부를 잘 챙겨주지 못해 늘 미안해하는 ‘평범한’ 취업주부다.

이 씨는 지난해 문을 연 EBY아카데미에 출근하면 가족영어사이트 ‘이보영의 영어친구닷컴’(www.eby.com)에 오른 질문에 답변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나마 출근길에 둘째 상우(5)를 유치원에 데려다줄 수 있는 것도 9년 장수 프로그램 EBS 라디오 ‘모닝 스페셜’을 두 달 전 그만둔 덕분이다.

“아이 때문에 그만두었어요. 아들이 아침에 엄마가 없는 것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습니다. 괜히 화내고 짜증내고…여름휴가 때 모처럼 아이 손을 잡고 집 앞에서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는데 아이가 기뻐 어쩔 줄 모르더라고요. 제 주위를 맴돌며 팔짝팔짝 뛰고….”

유학 간 딸에게는 아침에 토스트 먹고 혼자 책가방 싸서 등교하도록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미안하단다.

“제가 집에 있었다면 아이가 공부를 좀 더 잘 했을 거예요. 소심한 성격이라 학교생활을 힘들어했습니다. 저는 유학에 반대했는데 상민이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 미국에 교환학생으로 3개월 다녀오더니 유학을 자청했어요. 제가 갖고 있지 않은 배짱이 있다고 생각해 어렵게 수락했습니다.”

이 씨는 곁에서 아이의 사춘기를 지켜볼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아이를 일류대에 보낼 생각은 없다. 다만 아이가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은 것이 기특할 뿐이다.

이 씨는 대인기피증이 있을 정도로 소심한 자신의 성격을 영어를 통해 바꾸었다지만 최초의 여성비행사인 어머니 김경오 씨(70)는 “내가 독립적으로 키웠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항상 강하고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공부하라고 하기는커녕 1등은 피곤하니 중간만 하라고 얘기했지요.”

첫딸인 보영 씨는 이화여대 영어교육과와 한국외국어대 동시통역대학원을 졸업한 토종 영어강사. 둘째 지영 씨(35)는 이화여대 영문학과를 나와 최근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에서 영어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한민국항공회 총재인 김 씨는 요즘도 매일 사무실에 출근한다. 그러나 보영 씨 자매가 어렸을 때는 아이들이 모두 등교한 뒤 외출했고 저녁에 일찍 들어와 아이들을 맞았다.

보영 씨는 “어렸을 때 집안일을 도와주는 도우미가 없었다고 하면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 어머니는 오전 3시 반에 일어나 집안일을 했다”며 “어머니는 ‘자신의 일’을 위해 잠을 희생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박영숙(지속가능발전위원회 위원장) 이연숙 아주머니(전 정무 제2장관)들을 어렸을 때부터 뵈었어요. 어머니도 말씀하셨지만 그분들은 뭔가 남과 다르게 노력했어요. 평범한 주부들이 가정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도 좋지만 사회에서 뭔가 되려면 답은 간단해요. 뭔가를 희생해야 하죠.”

이 씨에게 ‘역할모델’이 가까이 있었던 것도 행운이다.

그러나 일하는 엄마의 고민은 끝이 없다. 어머니 세대만큼 집안일에 얽매일 필요는 없지만 아이들 교육만큼은 부담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취업주부의 아이들이 전업주부 아이들보다 성적이 뒤떨어진다는 연구결과가 많다. 그러나 취업주부의 아이들은 전업주부의 자녀보다 사회성과 자아정체성이 더 높다는 연구결과도 많다.

한신대 재활학과 이경숙 교수팀이 지난해 서울지역 6개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다니는 만 3∼5세 유아 842명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취업주부를 어머니로 둔 학생의 사회적 기술능력은 12.22점(21점 만점)으로 전업주부 자녀(11.49점)보다 높았다.

이 교수는 “직업을 가진 어머니는 보육시설이나 조부모, 도우미 등에 자녀양육을 의뢰하게 된다”며 “이 과정에서 아이는 대인관계를 적절히 이끌어 나가는 사회적 기술을 습득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우스갯소리를 마저 소개한다. 서초동 주부는 맞벌이가 많아 자녀가 등교할 때 함께 집을 나선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전화로 “엄마, 어려운 것이 있어요” 하고 물으면 “잠깐만 기다려라. 아빠가 퇴근한 뒤에 가르쳐줄 거다”라고 대답한다. 참, 서초동에는 법조인이 많이 산다.

김진경 기자 kjk9@donga.com

▼일하는 모녀의 ‘영어교육 이렇게 시켰어요’▼

●최초의 여성 비행사 김경오 씨의 영어박사 키우기

36년 전 국제회의에 참가하면서 영어가 생활화되겠구나 생각했다. 아이들이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을 때부터 단어를 되풀이해 들려줬다. 또 AFKN를 하루 종일 틀어놓았다. 아이들과 드라마나 만화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다. 보영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됐을 때부터 외국에서 온 공문의 단어를 찾도록 했다. 보영이가 중고등학교 시절 외국스타에게 열광할 때 ‘편지를 쓰면 내가 부쳐주겠다’고 약속했다. 보영이는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며 영작을 배웠다.


●인기 영어강사 이보영씨의 ‘영어 좋아하는 아이’만들기

맏딸에게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유치원 때부터 비디오를 보거나 책을 함께 읽을 때 영어를 조금씩 넣어 얘기해줬다. 단, 아이가 영어를 지겨워하지 않도록 양을 최소한으로 했다. 영어를 보거나 듣고 행동하게 하면 영어를 배우는 데 가장 효과적이다. ‘Open the window(창문을 열어줄래)’ 하고 시키거나 냉장고에 포스트잇으로 ‘Call and order 자장면 for lunch’(자장면 시켜 먹어라) 하고 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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