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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3월 14일 19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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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말이 필요 없는 세계 정상급 성악가다. 플라시도 도밍고 국제성악콩쿠르 제1회 우승자이며 260년 전통 슈타츠오퍼의 주역 가수다. 올해와 내년 시즌에는 세계 최고의 오페라무대인 뉴욕 메트로폴리탄극장에서 공연한다. 그것도 ‘탄호이저(바그너)’ 등 세 작품에서 큰 역을 맡는다.
한국 남자 성악가로서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서는 사람은 그가 처음. 2006년까지 비엔나 슈타츠오퍼를 비롯한 유럽 정상급 무대에서의 연주 일정도 꽉 차 있다.
그는 2000년 오스트리아 문예전문지 ‘뉴즈(News)’가 선정하는 ‘세계성악가 베스트 50’에 뽑히기도 했다. 테너 바리톤 베이스 소프라노 알토 등 음역별 5개 분야에서 10명씩 뽑는 데 든 것이니 현존하는 세계 베이스 가운데 10명 안에 든 셈이다. 얼마나 많은 재능과 행운을 타고났기에 그렇게 성공했을까. 더구나 음악은 재능 못지않게 성장 배경과 교육, 주변의 지원이 중요한 분야가 아닌가?
그는 재능은 몰라도 행운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농사꾼의 장남으로 태어나 공업고등학교를 다녔다. 대학도 지방대를 나왔다. 유학은 미국이나 서유럽이 아니라 불가리아로 갔다. 플라시도 도밍고 콩쿠르도 어렵게 본선에 합류해 우승자가 됐다. 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는 두세 마디 정도 부르는 단역에서 출발해 주역으로 도약했다.
말 그대로 ‘바닥’에서 출발해 ‘오늘’을 이루었다. 그의 성공 비결은 뭘까?
1984년 대학에 입학한 그의 남다른 목소리와 성실함을 눈여겨본 주완순 교수가 등 떠밀어 2학년 때 나간 국내 콩쿠르에서 그는 1등상인 문교부장관상을 받는다. “기대 밖의 성과라 큰 충격을 받았다”고 그는 기억했다.
용기를 얻은 연씨는 졸업할 때까지 대학가곡제와 동아, 중앙 음악콩쿠르 등 국내 유명 콩쿠르에 나갔다. 결과는 모두 2등. 주 교수를 비롯해 그를 아깝게 여긴 음악계 인사들이 유학을 권유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대학 학비도 겨우 마련한 처지에 유학은 언감생심이었지만, 아버지는 “점쟁이가 너는 외국을 제집 드나들 듯 살 팔자랬다”며 어렵게 3000달러를 마련해 주었다.
이 돈을 갖고 그가 찾아간 곳이 불가리아 소피아국립예술대학이었다. 미국이나 서유럽으로 유학 갈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노래를 들어본 소피아국립예술대 레자 콜레바 교수는 ‘더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며 독일 베를린국립음대 유학을 알선해 주었다.
92년 베를린음대에 입학한 그에게 ‘운명처럼’ 플라시도 도밍고 콩쿠르가 다가왔다. 93년 세계 3대 테너의 한 사람인 도밍고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성악 콩쿠르를 열기로 했다.
먼저 유럽 8개국에서 예선이 실시됐다. 연씨는 뮌헨에서 열린 독일 예선에 나갔으나 떨어졌다. 하지만 국가별로 4명씩 뽑은 본선 진출자 32명 가운데 1명이 출전할 수 없게 되는 바람에 그에게 기회가 왔다. ‘와일드카드’로 본선에 진출한 그는 대상을 거머쥐었다. 공고 출신 연광철이 세계 음악계에 이름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도밍고는 대상을 수여하면서 “세계 오페라계에 보석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콧대 높은 유럽 성악계는 동양인 콩쿠르 수상자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는 94년 정식 오디션을 거쳐 베를린 슈타츠오퍼에 입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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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신(신장 170cm)의 동양인에게 프로 오페라 무대는 힘겨웠다. 베이스는 대개 왕이나 제사장 같은 권위 있는 역을 맡는다. 다른 출연자보다 체구가 더 커야 무대의 ‘전체 그림’이 맞는다. 언어 문제도 만만치 않았다. 연씨는 이런 약점들을 실력으로 메워갔다. 남들이 쉴 때도 연습하고, 촌음을 아껴 독일어를 공부했다. 기회는 예고 없이 찾아왔다. 99년 마이어베어 작품인 ‘악마 로베르’의 주역 베이스를 맡은 이탈리아 성악가가 펑크를 냈다. 엉겁결에 ‘대타’로 출연한 그는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독일 비평계에서도 찬사가 쏟아졌다. 연씨가 슈타츠오퍼의 간판스타로 뜨는 순간이었다.
이어 2002년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축제에 ‘탄호이저’의 헤르만 영주 역으로 출연한 그는 ‘독일 음악평론계의 황제’라고 불리는 요아힘 카이저에게서 최고 찬사를 듣는다. “바그너가 찾던 바로 그 목소리다.”
연광철 본인이 말하는 성공 비결은 뜻밖에도 “꿈이 작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분수에 맞지 않는 허황된 꿈을 꾸지 않았다. 내 앞에 보이는 작은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그 작은 꿈을 이루면 언제나 새로운 길이 보였다.”
그는 또 “언제나 준비가 돼 있었다”고 했다. “도밍고콩쿠르나 슈타츠오퍼 입단 오디션, 또 갑자기 대역을 할 때도 나는 준비가 돼 있었다. 당장은 아니어도 꾸준히 연습하면 준비된 나를 쓸 사람이 꼭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는 단역 시절 독일 성악가들이 극장측과의 친분을 이용해 자신이 맡을 큰 역을 가로채는 일도 적지 않게 당했다고 한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았다. 정상급 무대에서 노래할 수 있는 데 만족했다. 진짜 실력은 분장하고 의상 입혀 주는 사람도 다 아는 만큼 기다리면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국의 교육, 특히 음악교육이 허황된 꿈을 키운다”고 우려했다. “학생의 가능성을 알아보기보다는 무조건 성공한 사람의 모델을 답습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학생들이 처음부터 너무 큰 꿈을 꾸다가 중도에 좌절하기 쉽다.”
● 연광철은
△1965년 충북 충주 출생
△1984년 충주공고 졸업, 청주대 음악교육과 입학
△1987년 동아 음악콩쿠르 입상
△1990년 불가리아 소피아국립예술대 유학, 레자 콜레바 교수 사사
△1992년 독일 베를린국립음대 입학
△1993년 플라시도 도밍고 국제콩쿠르 우승
△1994년 베를린 슈타츠오퍼 입단
△2000년 오스트리아 문예전문지 ‘세계성악가 베스트 50’에 선정
△2002년 문화관광부 수여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수상
△2002∼2004년 독일 바그너 축제에 ‘탄호이저’의 헤르만 영주 역으로 출연
△2004∼2005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탄호이저(바그너)’
‘마술피리(모차르트)’ ‘아이다(베르디)’ 등 3작품에 출연 예정
베를린=박제균특파원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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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사가 꿈이었는데…▼
성악가 연광철의 첫 인생 목표는 건축기능사가 되는 것이었다. 농사꾼의 장남으로 태어나 농사의 고단함을 곁에서 지켜본 그는 기술을 가진 기능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입학한 곳이 충주공고 건축반.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의 목표는 흔들림이 없었다. 3학년 여름 동기생의 90%가 붙는 건축기능사 자격증 시험에 떨어지기 전까지는.
고교 시절 반장도 하고 학업성적도 좋았던 그의 낙방은 의외였다. 실의에 빠진 그에게 불현듯 2학년 때 교내음악경연대회에서 ‘선구자’를 불러 1등을 차지했던 일이 스쳐갔다.
공고 3년생 연광철은 목표를 음악교사로 바꿨다. 대학 음악교육과 진학을 위해 음악공부를 시작한 그는 앞이 캄캄했다. 모교인 공고에는 피아노조차 없었다. 그렇다고 변변치 않은 집안 형편에 “서울 가서 레슨 받겠다”고 할 엄두도 안 났다.
고민하던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뜻을 털어놓았다. 잠자코 듣던 아버지는 “네 태몽이 지붕에서 잘생긴 수탉 한 마리가 우는 것이었다”며 “뭐가 필요하냐”고 물었다. “풍금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자 두 말 않고 풍금을 사주었다.
그때부터 공고생 연광철의 음악공부가 시작됐다. 그는 충주시내 피아노학원을 찾아가 기초 교습과정인 ‘바이엘’부터 익히기 시작했다. 건축반의 제도 수업시간에는 종이에 피아노 건반을 실물 크기로 그려 손가락 연습을 했다. 밤에는 집에서 풍금을 치면서 노래 연습을 했다.
고요한 시골마을에 밤만 되면 그가 내는 ‘소음’이 울려 퍼졌다. 동네사람들은 “저 집 큰 아들이 왜 저러느냐”고 입방아를 찧었다.
이렇게 3개월을 보낸 그는 청주대 음악교육과에 합격한다. 만일 그가 건축기능사 자격시험에 붙었더라면 오늘의 연광철이 있었을까. 실패는 또 다른 기회의 시작이라는 말을 그는 몸으로 입증해 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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