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세러피]'킬 빌'…움직여야 할 '존재의 이유'

  • 입력 2003년 12월 4일 16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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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차마 뭐라 할 말조차 떠오르지 않고 그저 ‘내가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압도당하곤 한다. 내가 구로사와 아키라였으면, 피터 잭슨이었으면, 혹은 박찬욱이었으면 좋겠다고 느낀 적이 있다.

그러던 내가 최근에는 ‘영화 속의 배우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 적이 딱 두 번 있다. 한 번은 ‘시카고’를 보며 내가 캐서린 제타 존스이기를 꿈꾼 것이고, 또 한 번은 현재 상영 중인 ‘킬 빌’(감독 쿠엔틴 타란티노)을 본 뒤 ‘내가 우마 서먼이었으면…’ 하고 생각한 것이다.

왜 ‘쿠엔틴 타란티노’가 아니라 ‘우마 서먼’일까. ‘킬 빌’은 전적으로 주인공 브라이드 역을 맡은 우마 서먼의 몸이 세상과 만나 싸우는 순간들로 가득 차 있다. 물론 그녀는 너무나 매력적이고 늘씬하지만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그녀의 몸이 어떻게 생겼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움직이는가’이다.

그녀의 노란색 ‘추리닝’은 몸의 일부처럼 밀착되어 있고, 하토리 한조에게서 받은, 잘 드는 일본도 역시 그녀 몸의 일부가 되어 움직임의 날렵함을 극대화한다. 영화에 흐르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은 그녀 몸의 움직임에 때로는 빠르고 때로는 유장한 리듬을 부여한다. ‘킬 빌’에서는 복수의 사연보다 몸의 움직임과 그 움직임이 나아가는 방향이 영화를 지배한다.

반면 실제의 우리는 생각이 과잉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일상을 살다 보면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그것을 해결하려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가 가진 어떤 자원을 어디에 이용해야 하는지 온통 계산하고 생각해야 하는 일뿐이다.

그런데 정작 ‘내 몸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얼굴이나 몸을 보기 좋게 만들기 위해 애쓰지만 그것은 몸 자체를 존중해서라기보다 그렇게 아름다워진 얼굴과 몸이 다른 목적을 더 잘 수행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닌가. 그것은 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킬 빌’에서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퇴원한 브라이드가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다리를 움직이기 위해 애쓰는 장면이다. 우마 서먼의 발이 클로즈업되고, 그녀는 머릿속으로 복수의 시나리오를 구상하다가도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엄지발가락이 움직여야 돼”라고 말한다. ‘발가락을 움직이는 것’, 즉 몸을 움직이는 것은 ‘내 존재가 여기 살아 있음’을 스스로에게 전달해 주는 과정이며, 어쩌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움직임보다 앞서 있다.

우리가 아주 어렸던 시절에 느꼈던 즐거움과 편안함의 원천은 위로나 칭찬의 ‘말’보다는 어머니가 안고 흔들어 줄 때의 느낌, 내 발로 땅을 딛고 뛰어 놀 때의 흥분된 기분 같은 것이었다. 지금 일상에 지친 우리가 원하는 것도 관념이나 생각보다는 그런 신체적인 느낌들이 아닐까. 그래서 우울과 의욕 저하를 호소하는 환자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로 괴로운 환자들에게는 일단 몸을 움직이고 운동을 좀 해보라고 권유하곤 하는 것이다.

‘킬 빌’에서 브라이드가 콘플레이크 상자에서 발사되는 총알을 휙 피하며 상대의 가슴에 단검을 날릴 때, 청엽옥에서 일본도를 휘두르며 자객들의 팔다리를 뎅겅뎅겅 날릴 때, 고고 유바리가 던진 철퇴가 그녀의 목에 감겼다가 확 풀릴 때 나는 일어나 휘파람을 불고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 된다. 잊고 살았던 ‘몸’을 그녀가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하나씩 날아가는 팔다리와 머리, 솟구치는 피는 역시, 몸이 거기 존재하고 있었음을 역설적으로 알려주는 도구다. 타란티노 감독의 전작 ‘펄프 픽션’에서 존 트래볼타와 우마 서먼이 트위스트를 추던 장면이 매혹적이었던 것도 몸의 움직임을 일깨워줬기 때문이 아닐까. ‘킬 빌’은 어쩌면 혼수상태에 빠졌던 브라이드처럼 몸을 방치해온 우리에게,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세상의 복잡한 시스템에 던지는, 통쾌한 복수와도 같은 영화다. 자, 그러니 이제 몸을 한 번 움직여 보자. 가능하다면 노란 추리닝을 입고!

유희정 정신과 전문의 경상대병원 hjyoomd@unitel.co.kr

▼곁들여 볼 비디오/DVD▼

○ 블러드:더 라스트 뱀파이어

세일러복을 입고 일본도를 든 소녀 사야가 인간의 적인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전사로 활약하는 과정을 그린 애니메이션. ‘킬 빌’에서 오렌(루시 리우)의 과거를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은 이 영화를 참고한 것. 100% 디지털로 제작됐으며 제작사인 프로덕션 I.G가 ‘킬 빌’의 애니메이션 파트를 담당했다.

○ 사무라이 픽션

‘킬 빌’의 청엽옥 전투에서 푸른 배경 위에 브라이드와 야쿠자들의 실루엣만 보이는 장면은 이 영화 가운데 붉은 배경에서 전사들의 실루엣만 보여주던 한 장면을 패러디한 것. 나가노 히로유키 감독의 데뷔작인 오락영화. 과장된 캐릭터들의 우스꽝스러운 행동, 경쾌한 편집 등은 한 편의 뮤직비디오를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 아들을 동반한 검객

‘킬 빌’의 유혈이 낭자한 장면들은 미스미 겐지가 감독한 이 영화를 재현한 것. 한때 쇼군의 호위무사였던 오가미가 유모차에 태운 어린 아들과 함께 방랑하며 원한을 피로 갚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사지를 절단하고 신체를 반으로 쪼개는 등의 잔인한 장면이 많다.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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