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엔드 포커스]아역배우 뜬다던데…

  • 입력 2003년 11월 27일 16시 44분


코멘트
요즘 광고시장에서 인기가 높은 아역 모델 심혜원, 정다빈, 강윤도(왼쪽부터). 크리스마스 앨범에 들어갈 캐럴 녹음 작업이 한창이다. 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요즘 광고시장에서 인기가 높은 아역 모델 심혜원, 정다빈, 강윤도(왼쪽부터). 크리스마스 앨범에 들어갈 캐럴 녹음 작업이 한창이다. 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성주 엄마, 어제 드라마 봤어? 꼬마 탤런트, 연기 너무 실감나지 않아?”

“그 아이 때문에 꼭 그 드라마 본다니까. 요즘엔 광고에도 나오던데.”

“성주도 연기 한 번 시켜보지 그래? 돈도 많이 번다더라.”

“애들 성격 다 버리지 않을까? 그러다 공부라도 안 하면….”

지하철 안에서 들은 30대 주부들의 대화가 남의 이야기일까. TV에 나오는 아역 탤런트들을 보고 있자면 ‘우리 아이도…’란 생각이 한번쯤은 들기 마련.

최근 드라마와 광고 등에 아역 탤런트들이 ‘뜨고’ 있다. 이미 초등학생들 사이에는 연예인이 장래희망 1순위로 꼽힐 정도. 그러다보니 연기학원에는 엄마 손을 잡고 찾아온 아역 배우 지망생들이 넘쳐난다.

그렇다면 아역 스타의 삶은 정작 어떨까.

이미 연예계에 진출한 아역 스타나 그 과정을 걷고 있는 어린이의 엄마들에게 아역 스타에 대한 꿈과 고민을 들어보았다.


▽정다빈(3)경력 1년. 베스킨라빈스, 매일요쿠르트, 존슨&존슨, 세띠앙아파트 등의 광고 출연 ▽심혜원(6) 경력5년. 아인슈타인 베이비, 썬키스트, 래미안 아파트, 오뚜기 곰탕 등의 광고 출연, ▽강윤도(4)경력2년, 농심 안성탕면, 맥도날드,SK텔레콤, 캔키즈아동복 등 광고 출연.

●내 아이를 스타로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 연기학원의 교실. 아역 배우를 지망하는 5, 6세 아이들 대여섯 명이 뛰노는 모습은 여느 유치원 못지않게 소란스럽다.

그러나 선생님이 들어오자 아이들은 언제 떠들었느냐는 듯이 표정을 가다듬고 주어진 배역에 몰입하기 시작한다.

“머∼라고요? 수프에 들어가는 재료가 이상하잖아요.”

“어머나, 그게 거기 왜 들어가 있죠?”

식당에서 손님이 감자 수프에 오이가 들어간 것을 지적하는 역할극 장면. 손님 역의 아이가 눈꼬리를 치켜올리고 당장 달려들 듯이 항의하자 주방장을 맡은 아이는 이마에 땀까지 송골송골 맺히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이렇게 진지한 연기에 부모들도 놀란다.

여러 번 드라마에 출연한 동호(6)의 엄마 김수나씨(32)는 “방금 전까지 칭얼대던 애가 카메라 앞에 서자 갑자기 어른스러워지는 것을 보고 얘가 내 아인가 싶었다”고 말한다.

창진이(5)는 네살을 갓 넘기자마자 연기학원에 등록해 대본을 읽으며 넉달 만에 한글을 깨우쳤다. 엄마 신제씨(35)는 “연기가 공부에도 도움을 준다는 것은 예상치 못했던 성과였다”며 만족해 했다. 경남 창원에 살던 창진이네는 매주 수요일 서울에 왔다가 주말에 내려가곤 했는데 8월 아예 산본으로 이사를 왔다.

‘연기 10개월 차’인 이들은 학원의 단계별 프로그램에 따라 드라마나 광고 등에 단역으로 막 출연하기 시작한 ‘신인’들.

일부 연기 학원들은 방송국과 연계해 출연료가 거의 없는 단역 배우로 내보내는 대신 신인들은 실전 연습의 기회를 보장받는다.

학원에선 발음, 발성에서부터 재즈댄스 등 다양한 훈련을 시키지만 엄마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연기학원 안에서도 다른 아이들과 차별화된 특기를 하나라도 더 키워주기 위해 피아노, 미술, 발레 학원 등은 따로 보냈다. 여기서도 어쩔 수 없이 생존경쟁이 치열했다.

●아이들 절반이 중도하차

한 해 배출되는 아역 배우들은 얼마나 될까.

규모가 가장 크다는 MTM 연기학원의 황의노 이사는 “분기별 모집에 50∼60명의 아이들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최근 아역 붐을 타고 연기학원이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 현재 서울에만 35개가량에 이르고, 지방까지 합하면 훨씬 많다.

학원을 통하지 않고 모델로 활동하는 아이들도 적지 않다. 한국모델협회 유범렬 회장은 “500∼600개나 되는 모델 에이전시들이 우후죽순으로 모델 선발대회를 개최해 선의의 피해자도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연기학원은 보통 4, 5세 때부터 등록할 수 있지만 9, 10세 어린이들이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다. 한 번에 2시간반 정도씩 일주일에 2, 3번 수업을 받고 대략 30만원선의 수강료를 낸다. 가입비는 50만원선. 한 과정은 대략 3개월. 1년 정도 지나면 연기자로서의 자질이 어느 정도 판가름난다. 수강 인원의 절반은 6개월을 채 못 넘기고 중도하차 한다.

황 이사는 “얼굴이 예쁘면 우선 주목을 받기 쉽지만 요즘에는 연기력이 뛰어난 개성파 아역들이 오히려 인기가 높다”며 “외모에 자신이 없더라도 연기에 승부를 걸도록 유도해도 좋다”고 말했다.

현재 인기 드라마 ‘대장금’에서 어린 장금 역으로 나와 일약 스타가 된 조정은양(6)은 대사처리가 완벽해 캐스팅 오디션에서 경쟁자들을 모두 물리친 경우. 대부분 처음 보는 얼굴이라고들 생각하지만 연예계 활동 ‘3년차’다.

18일 경기 일산신도시 모 시트콤 야외촬영 현장에서 만난 정은이 엄마 지순희씨(42)는 “활동을 계속시켜야 하는지 고민스럽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종일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정은이가 못내 안타까웠던 것. 이렇게 해서 받을 수 있는 수입은 회당 3만∼5만원선.

한 연기학원에서 표정연기 수업 중인 아역 탤런트 지망생들. 학원 다닌 지 10개월 된 이들은 각 방송국 드라마나 광고에 단역으로 출연 중이다. 유은지, 이지희, 박진, 김현지 어린이(왼쪽부터).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돈을 위해선 시키지 말것

최근 광고계의 신데렐라로 부각된 아역 모델 심혜원양(6). 일반적으로 드라마보다는 광고를 해야 수입이 많다고는 하지만 광고모델 5년차인 혜원이가 받는 금액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적었다. 엄마 채영수씨(34)는 “어른 연기자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고생해야 하는 아이들에겐 턱없이 낮은 금액”이라며 “본인이 하지 않겠다면 언제든지 그만 둘 생각“이라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단역 아역모델의 6개월 모델료(단발광고)는 1500만원선. 스타급 모델이라도 매니지먼트사들과 분배하고 나서 실제로 받는 금액은 600만∼800만원선에 불과하다.

아역배우의 부모들이 꼽는 가장 큰 성과는 돈보다는 오히려 아이들의 달라진 생활태도였다.

딸 현지(6)에게 연기를 시키고 있는 박경선씨(29)는 “평소 내성적이던 아이가 연기를 하면서 밝고 쾌활해졌다“고 강조한다.

지희(6) 엄마 김미영씨(33)도 “요즘은 학교 엘리트보다는 사회 엘리트를 원한다”며 “공부만 잘하는 아이보다는, 재미있고 분위기를 이끄는 사람으로 자라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자녀의 손을 잡고 학원을 찾는 부모들은 대개 스스로가 ‘끼’가 있거나 자신의 소극적인 삶을 후회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아이들이 자신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보통 아이들의 경우라면 부모의 기대는 활달한 성격을 길러주는 데서 그쳐야 할 것 같다. 실제 연예활동을 시작하게 되면 ‘어린이’가 아닌 ‘연기자’로서의 엄격한 생활과 따가운 주변의 시선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가 연예활동 중인 미취학 아동 20여명을 취재한 결과 이들은 연기를 배우는 것은 재미있어 하면서도, 실제로 촬영 스케줄에 맞춰 움직이는 것은 힘들고 재미없어 했다. 시트콤 순풍산부인과에서 미달이 역을 맡아 인기를 끌었던 아역배우 김성은(12)이 얼마 전 주변의 놀림과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해외로 이민을 떠났다. ‘아이들의 연예활동은 어떤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낳을지 모른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김재영기자 jayk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