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칼럼]어제의 정의, 오늘의 정의

  • 입력 2003년 7월 9일 18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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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베를린의 첫날이 6월 26일이 된 것은 우연이었다. 호텔에서 받아 본 조간신문마다 1963년 초여름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서베를린을 방문했던 뉴스 아닌 뉴스로 1면 머리와 논설란 등을 메우고 있었다. 62년 가을 쿠바의 미사일 위기 때 핵전쟁 일보 전의 낭떠러지에서 소련의 니키타 흐루시초프와 대결해 완승을 거둔 케네디 대통령이 그 여세를 몰아 다음해 여름, 분단 도시 베를린을 찾아와 장벽에 갇혀 살던 시민들을 향해 ‘혼을 뽑아 놓은’ 명연설을 한 것이다.

▼‘자유와 인권’ 계속되는 베를린 ▼

“2000년 전의 사람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것은 ‘나는 로마 사람’이란 말이었다. 오늘날 자유세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나는 베를린 사람’이란 말이다. 그렇기에 나도 자유인의 한 사람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한다. 이히 빈 아인 베를리너!(나는 베를린 사람이다!)”

레토릭 역사상 일품이 된 케네디의 연설에 열광했던 시청 앞 광장의 40만 군중 속에 나도 끼어 있었다. 어느덧 40년 전의 옛날 일이다.

그 사이 케네디는 가고, 그의 좌우에 서 있던 당시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와 빌리 브란트 시장도 이미 고인이 됐다. 무엇보다도 그 사이 장벽은 사라지고 베를린은 통일 독일의 명실상부한 수도로 환생했다.

관광안내서를 보니 올 5월 개관한 베를린 중심부의 독일 역사박물관의 신관에서 ‘존 F 케네디 전’이 요슈카 피셔 외무장관의 테이프 커팅으로 개막된다 해서 가 보았다. 64년 재클린 케네디의 위촉으로 미국 보스턴에 ‘존 F 케네디 도서관’을 설계해 일약 스타가 된 중국계 건축가로, 프랑스혁명 200주년 기념으로 루브르 박물관 뜰에 유리 피라미드를 세운 I M 페이가 설계한 베를린의 역사박물관 신관에선 케네디 특별전과 함께 2개 층에 걸친 ‘유럽 통합의 역사전’, 그리고 페이의 수많은 박물관건축전도 함께 열리고 있었다.

1963년과 2003년…. 유럽의 60년대라면 우리나라의 386세대에 비길 수 있는 이른바 ‘68세대’가 기성의 권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시위와 시가전을 벌였던 때였다. 그로부터 40년 후, 저들 68세대는 오늘의 유럽을 이끌어가는 각계 각층의 리더가 되고 있다.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도 피셔 외무장관도 68세대 출신이다. 1963년부터 2003년 사이에는 단절만이 아니라 연속이 있는 셈이다. 자유와 인권, 유럽의 다원주의와 통합과 같은 보편적 가치에 대한 일관된 사회적 합의와 믿음이 거기엔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어제의 진실은 오늘도 진실이고, 어제의 정의는 오늘의 정의이기도 한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의 40년 전의 레토릭이 오늘도 녹슬지 않는 감동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옛 서독의 수도 본을 위시해 통일 후의 라이프치히, 그리고 올해 개관한 베를린의 독일역사(현대사)박물관들을 둘러볼 때마다 느끼는 소감이기도 하다.

2003년의 한국인에게 오늘 다시 들어도 변함없이 공감할 수 있는 40년 전의 말 같은 것은 없을까. 아니 그보다도 40년 전 한국의 2030세대와 오늘의 2030세대 사이에 변함없이 공유되고 있는 보편적 가치 같은 것은 없을까. 어제의 정의가 오늘에도 정의로 통할 수 있을까.

▼대화가 단절된 2003년 한국 ▼

있다. 그렇다고 나는 대답하고자 한다. 6·25남침을 경험한 세대가 만일 80년 광주 대참극을 경험했다면 그들 또한 386세대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고, 오늘의 386세대가 만일 6·25남침을 경험했더라면 그들 또한 반김(反金) 반핵(反核) 시위 집회에 모인 기성세대와 다름없는 한국인이 되었을 거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문제는 오직 어제의 정의와 오늘의 정의 사이에 대화가 없고, 어제의 진실과 오늘의 진실 사이에 역사적 맥락의 연결이 없다는 사실이다. 현대사 연구, 현대사 교육, 현대사 박물관이 그래서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실은 문민정부 때 뜻있는 이들이 어렵사리 정부 당국자를 설득해 겨우 현대사연구소를 설립해 놓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마저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자 없애버린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정호 석좌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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