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흰 그늘의 길' 낸 시인 김지하

  • 입력 2003년 7월 8일 18시 25분


코멘트
김지하씨는 “비극적인 기억이 회고록이라는 실체로 드러나 허망한 생각이 들지 모르겠지만 나는 비장하거나 처절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주일기자
김지하씨는 “비극적인 기억이 회고록이라는 실체로 드러나 허망한 생각이 들지 모르겠지만 나는 비장하거나 처절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주일기자
70년대 담시 ‘오적(五賊)’으로 필화 사건을 겪고 ‘민청학련사건’ 배후 조종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기도 했던 김지하(62·본명 김영일)의 회고록 ‘흰 그늘의 길’(전3권·학고재)이 출간됐다. 많은 문필가와 운동가들에게 빚을 느끼게 했던 ‘큰 시인’ 김지하의 개인사와 운동가로서의 면모, 서양과 동양의 정신을 조화시키려는 사상가의 궤적이 한눈에 잡힌다.

8일 기자들과 만난 그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동기와 후배들이 그럽디다. 형님이 한 일은 의미를 차치하고라도 문제성을 포함하고 있지 않느냐, 데이터를 남겨 둬야 나중에 검색이라도 한다고요. 요즘 젊은이들이 사건은 알지만 그와 관련해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났던 생각의 흐름은 모르지 않습니까.”

덧붙여 그는 두 아들을 위해 회고록을 썼노라고 말했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말을 잘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예민한 시절에 아버지와 대화가 없었던 것이죠. 내 이야기를 써두면 언젠가 읽을 거라 생각합니다.”

작가는 서두에 ‘나는 이 글에서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라고 분명히 말하고자 한다’라고 적었다. ‘애비는 종이었다’는 한마디에 인생이 결정된 미당 서정주 시인처럼 그 말은 작가를 묵직하게 누른다.

“전기회로기술자인 아버지는 빨치산으로 입산했습니다. 이후 전기고문으로 반신불수가 돼 일을 할 수가 없었지요. 고향인 목포를 등지고 원주로 간 것도, 내게 배어있는 좌파적 분위기도 모두 아버지로 인해서죠.”

영적 흥분에 사로잡혀 ‘오적’을 사흘 만에 써내려간 것, 1970년대 초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는 이종찬(전 국가정보원장)과 쿠데타를 모의했던 이야기도 있다.

“수유리 육당 최남선 별장 앞 잔디밭에서 단 둘이 만났습니다. 학생운동이나 민중운동은 효과적인 쿠데타에 의해 관철돼야 한다는 것에 둘이 합의했지요. 우리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인물이 정치를 하게 할 요량이었죠.”

장일순과 이종찬 두 사람이 쿠데타를 준비하고, 김대중씨를 대통령으로 세우되 책임을 지는 각료와 집권 세력의 3분의 2는 반드시 ‘우리’ 세력이 차지해야 한다고 합의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요기-사르’(인도의 수도승+직업혁명가)의 길을 걷겠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스님처럼 평안한 내면과 직업혁명가처럼 능란한 외면을 갖춘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늘 생각합니다.”

그도 단박에 시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창작과비평사에 시 몇 편을 보냈다가 퇴짜맞고 평론가 김현의 비공식 추천을 받아 ‘김지하’라는 필명으로 1969년 시전문지 ‘시인(詩人)’을 통해 비로소 등단한 것이다.

그의 인생의 하나의 삽화였을 시집 ‘애린’의 주인공에 대해 묻자 수줍은 듯 이야기를 꺼냈다.

“전혜린씨 막내동생 이름이 애린이었어요. (웃음) 내 마음이 원하는 부드러움이, 내게 결핍된 부드러움이 ‘애린’인 셈이죠.”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