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기자들과 만난 그는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동기와 후배들이 그럽디다. 형님이 한 일은 의미를 차치하고라도 문제성을 포함하고 있지 않느냐, 데이터를 남겨 둬야 나중에 검색이라도 한다고요. 요즘 젊은이들이 사건은 알지만 그와 관련해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났던 생각의 흐름은 모르지 않습니까.”
덧붙여 그는 두 아들을 위해 회고록을 썼노라고 말했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말을 잘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예민한 시절에 아버지와 대화가 없었던 것이죠. 내 이야기를 써두면 언젠가 읽을 거라 생각합니다.”
작가는 서두에 ‘나는 이 글에서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다라고 분명히 말하고자 한다’라고 적었다. ‘애비는 종이었다’는 한마디에 인생이 결정된 미당 서정주 시인처럼 그 말은 작가를 묵직하게 누른다.
“전기회로기술자인 아버지는 빨치산으로 입산했습니다. 이후 전기고문으로 반신불수가 돼 일을 할 수가 없었지요. 고향인 목포를 등지고 원주로 간 것도, 내게 배어있는 좌파적 분위기도 모두 아버지로 인해서죠.”
영적 흥분에 사로잡혀 ‘오적’을 사흘 만에 써내려간 것, 1970년대 초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는 이종찬(전 국가정보원장)과 쿠데타를 모의했던 이야기도 있다.
“수유리 육당 최남선 별장 앞 잔디밭에서 단 둘이 만났습니다. 학생운동이나 민중운동은 효과적인 쿠데타에 의해 관철돼야 한다는 것에 둘이 합의했지요. 우리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인물이 정치를 하게 할 요량이었죠.”
장일순과 이종찬 두 사람이 쿠데타를 준비하고, 김대중씨를 대통령으로 세우되 책임을 지는 각료와 집권 세력의 3분의 2는 반드시 ‘우리’ 세력이 차지해야 한다고 합의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요기-사르’(인도의 수도승+직업혁명가)의 길을 걷겠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스님처럼 평안한 내면과 직업혁명가처럼 능란한 외면을 갖춘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늘 생각합니다.”
그도 단박에 시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창작과비평사에 시 몇 편을 보냈다가 퇴짜맞고 평론가 김현의 비공식 추천을 받아 ‘김지하’라는 필명으로 1969년 시전문지 ‘시인(詩人)’을 통해 비로소 등단한 것이다.
그의 인생의 하나의 삽화였을 시집 ‘애린’의 주인공에 대해 묻자 수줍은 듯 이야기를 꺼냈다.
“전혜린씨 막내동생 이름이 애린이었어요. (웃음) 내 마음이 원하는 부드러움이, 내게 결핍된 부드러움이 ‘애린’인 셈이죠.”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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