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키위허스번드(kiwi-husband)…뉴질랜드 전형적 남편상

  • 입력 2003년 5월 15일 16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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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위허스번드인 스코트 디글먼(오른쪽) 로버트 나이베트씨가 주방에서 가족들에게 서빙할 디저트를 준비하고 있다. 북섬 카티카티읍 로버트씨의 자택에서 벌어진 파티에서 이들은 가족을 위해 쇠고기 바비큐와 송어구이를 정성스레 구워냈다. 카티카티=최수묵기자 mook@donga.com
키위허스번드인 스코트 디글먼(오른쪽) 로버트 나이베트씨가 주방에서 가족들에게 서빙할 디저트를 준비하고 있다. 북섬 카티카티읍 로버트씨의 자택에서 벌어진 파티에서 이들은 가족을 위해 쇠고기 바비큐와 송어구이를 정성스레 구워냈다. 카티카티=최수묵기자 mook@donga.com
#장면 1. 할아버지와 청소기

지금 뉴질랜드에서 눈길을 끄는 코믹 TV광고의 한 토막. 진공청소기로 거실 청소를 막 끝낸 할아버지가 골프가방을 벽장에서 조심스레 꺼내 거실로 나선다. 발꿈치를 들고 걷는 모습. 골프 치러 가기가 미안해 집안 청소를 살그머니 끝낸 것 같다. 이때 2층에서 내려오는 할머니. 한바탕 ‘싸움’이 벌어지는 것일까? 할머니의 복장은 화사한 파스텔톤의 스포티한 모습. 그리고 마지막 장면. 할아버지는 골프가방을 할머니에게 공손히 건넨다. 골프 치러 가는 당사자는 다름 아닌 할머니였던 것. 집안일도 할아버지의 몫이었다.

#장면 2. 퇴근 명령

북섬 타우랑가의 한 키위 유통회사. 5월부터 본격 시작된 한국과 아시아지역 수출문제로 회의가 오후 5시를 넘기자 아시아담당 A이사가 갑자기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회의가 길어질 듯한데… 조금 늦어도 될까요?”

A이사는 아내의 허락을 구한 뒤 오후 5시 반까지 회의에 참석했고 이후 부리나케 집으로 향했다. “너무 공처가인 것 아니냐”는 질문에 이 회사 직원들은 “오후 5시부터 아이를 보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 가정 사회 여성이 주도권

1893년 세계 최초로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한 국가 뉴질랜드에선 지금 여성의 지위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남성과 ‘동등한 수준’을 넘어 사실상 가정과 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양상이다.

여성인 헬렌 클라크 총리는 3년 임기를 마친 뒤 올 4월 두 번째 임기에 들어갔다. 형식적이지만 영국 여왕의 위임을 받아 입법 사법을 총괄하는 총독도 역시 여성인 실비아 카트라이트. 강금실씨가 법무장관에 임명되자 국내 분위기는 꽤나 시끄러웠다. 하지만 뉴질랜드 검찰총장에 여성인 마거릿 윌슨이 임명되었을 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밖에 보건장관(아넷 킹) 지방장관(샌드라 리) 노동 및 이민장관(라이언 달지엘) 여성 및 청소년장관(라이라 하레) 등 정부 핵심 요직을 대부분 여성이 거머쥐고 있다.

택시회사 사장인 존 오마나(67·오클랜드)는 이를 “페티코트 거번먼트(petticoat government)”라고 표현했다. ‘속치마 정부’라는 뜻으로 약간의 비아냥과 함께 남성의 자괴감이 뒤섞인 표현.

일부 비판도 있지만 뉴질랜드에선 여성의 정치, 사회적 활동이 당연한 것으로 굳어져 있다. 나아가 남편들의 ‘내조’도 상식화되어 있다. 1990년대 생겨난 신조어 ‘키위 허스번드(kiwi-husband)’가 이를 대변한다.

뉴질랜드인은 국조(國鳥)인 야행성 조류 ‘키위’의 이름을 따 스스로를 ‘키위’라고 부른다. 뉴질랜드의 대표 과일인 ‘치네시스’(chinesis)에도 1985년부터 ‘키위’라는 이름이 붙었다. ‘키위’가 사실상 국가 브랜드가 된 것. 이런 의미에서 ‘키위허스번드’는 뉴질랜드의 전형적인 남편상을 뜻한다.

1남1녀의 자녀를 둔 로버트 나이베트(44·농장주)는 “키위 허스번드는 가족의 행복을 인생의 최우선 가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했다. “일에 대한 성취나 경제적 부(富)보다는 가족을 먼저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는 뉴질랜드 5대 항구 중 하나인 북섬의 타우랑가에서 1시간반가량 떨어진 카티카티읍 옹가리리만에 키위농장을 경영하는 부농. 로버트씨는 “모두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키위 허스번드는 뉴질랜드의 보편적인 남편상으로 자리잡았다”고 덧붙였다.

그의 이웃 스코트 디글먼(41)도 스스로를 키위 허스번드라고 소개했다. 비교적 신세대에 속하는 그는 “결혼 전에는 일과가 끝나면 펍(pub)에서 술도 마시고 친구들과 어울렸다”며 “그러나 결혼 후에는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키위 허스번드는 대개 일이 끝나는 오후 5시면 집으로 직행한다. 부인과 가사(家事)를 분담하는 것은 기본. 가사를 2분의 1로 나누는 ‘산술적’ 계산법이 아니라 각자의 능력에 따라 안배하고 있다.

음식 만들기의 경우 집안 주방은 부인의 ‘고유 영역’. 로버트씨는 “주방은 집사람의 영토다. 나는 집밖에서 바비큐를 굽는 등 ‘위험’이 따르는 일을 맡는다”고 설명했다. 육아의 경우 부인은 자녀의 학교생활 관리와 잠재워 주기 등을 맡는다. 남편은 자녀와 함께 스포츠를 즐기거나 컴퓨터게임을 하는 등 ‘어울리는 친구’ 역을 한다.

남편이 가사를 돌볼 때 부인은 무얼 할까. 스코트씨는 이 질문에 “외출하거나 쉬는 경우는 드물다”고 했다. 가사는 ‘돌아가며 하는 일’이 아니라 ‘함께 하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의 눈에 아버지는 ‘친구’다. 로버트씨의 아들 사이먼군(12)은 “학교 친구들도 좋지만, 아빠와 집 뜰에서 축구를 하거나 컴퓨터 게임을 함께 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다”고 했다. 부인들도 “가정의 행복을 함께 만드는 남편들에게 만족한다”고 했다.

● 퇴근후 대부분시간 가족과 함께

로버트씨는 “내가 맥주를 마신다면, 아내에겐 와인을 준다”며 농담반 진담반으로 부인에 대한 ‘공경’을 내비쳤다. 그는 “집사람이 과수원일을 할 때는 내가 오후 3시 아들과 딸을 학교에서 귀가시키는 일을 한다”고 덧붙였다. 서로 여유 있을 때마다 가사를 돌본다는 이야기다.

키위 허스번드는 뉴질랜드의 경제 사회적 환경이 낳은 독특한 ‘산물’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곳 대학을 졸업한 뒤 정착한 김태훈 박사(37·원예학)는 “골프장이 인구 1만명당 1개, 그린피가 2만5000원 안팎인데도 같이 운동할 친구가 없을 정도”라며 “이는 인구 400만명이 남한의 2배 크기 국토에 흩어져 살면서 가족끼리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국민 대부분이 1차 산업(농업, 목축업)에 종사해 주택이 수백m∼수km씩 떨어져 있고, 특히 북섬의 경우 농장을 해풍으로부터 차단하기 위해 설치한 높이 10∼20m의 방풍림이 거대한 ‘벽’을 형성해 각 가정이 사실상 ‘섬’처럼 독립되었다는 것이다.

이혼할 때 남편이 부인에게 재산의 2분의 1을 의무적으로 줘야 하고, 자녀가 만 16세가 될 때까지 월급의 40%선을 양육비로 부담해야 하는 법조항도 ‘순한 남편’을 만드는 요인. 결국 남성은 이혼하려면 막대한 경제적 타격을 감수해야 한다. 이런 ‘엄격한 법규정’은 뉴질랜드 정부가 가정파괴를 막기 위해 도입한 것이지만, 부수적으로 여성의 지위를 강화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고 김 박사는 분석했다.

키위 허스번드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낙천적인 성격이 있기 때문에 더욱 가능했다. 최근 이혼률이 급상승하고 버려지는 아이들이 많아지는 한국 사회에는 타산지석(他山之石)이다.

타우랑가=최수묵기자 moo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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