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아…30년뒤 남산에서 만나자꾸나"

  • 입력 2003년 5월 14일 15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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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 열 살배기 코흘리개 꼬마 녀석들이 어느새 이렇게 자라 내 고희전(古稀展)을 열어 준다니 얼마나 흐뭇한지…."

고희를 앞둔 스승의 노안(老顔) 가득 미소가 번졌다. 이제는 40대의 문턱을 넘어선 '꼬마'들의 얼굴에도 덩달아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30여년 전 함께 가르침을 받던 초등학교 제자들이 모여 스승의 고희를 축하하는 서예전시회를 마련했다. 서울 영훈초등학교 3~8회 졸업생 26명이 스승의 날인 15일부터 21일까지 서울 종로구 관훈동 백악예원에서 '지호 이수홍(芝湖 李秀弘) 고희 기념 한글 서예 작품전'을 열기로 한 것.

"붓 잡는 법부터 획 긋는 법에 이르기까지 어린 우리들에게 일일이 손을 잡아주시며 서예의 길을 가르쳐주신 선생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이씨의 '수제자'이자 고희전 추진위원 대표인 5회 졸업생 조용두씨(43·포스코 경영연구원 수석 연구위원)는 "선생님께 붓글씨를 배우며 배우며 많은 인내심을 키우고 자신감도 얻었다"며 "선생님의 가르침이 지난 30년 동안 내 인생의 큰 버팀목이 됐다"고 말했다.

고희전을 함께 준비한 제자들은 현재 학계와 법조계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신욱희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최준곤 고려대 물리학과 교수, 김도연 국민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여훈구 사법연수원 교수, 김명한 성남지원 판사 등등. 동양화가 김혜원씨와 서양화가 장은경씨처럼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예술의 길에 들어선 제자들도 있다.

당시 이씨는 졸업하는 제자들에게 일일이 정성 성(誠), 효도 효(孝)등의 글자를 써 나눠주며 "1994년이 내가 환갑이 되는 해이니 남산 어린이회관 앞에서 노란 손수건을 달고 만나자"고 당부했다.

이씨가 6학년 담임을 맡았던 8회 졸업생 이경원씨(40·옥타놈코리아 이사)는 "약속한 날 설레는 마음으로 남산에 올라갔더니 선생님께서 12명의 동기들과 함께 서 계셨다"며 "선생님께서는 20여년이 지났는데도 우리 얼굴을 한눈에 바로 알아보셨다"고 말했다.

제자들은 "선생님은 매우 엄격했다"고 입을 모았다.

잠시 눈만 떼면 얼굴이며 옷이며 온통 먹물로 범벅이 됐던 장난꾸러기들을 강당에 가득 모아놓고 한 획 한 획 가르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이씨는 "200명 정도 되는 아이들을 일일이 손을 잡고 가르쳐주다 보면 나중에는 허리도 아프고 현기증이 나기도 했다"며 "그래도 다들 먹물 투성이가 돼 즐겁게 집에 돌아가는 걸 볼 때마다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씨는 장성한 제자들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며 "한참 뛰어 놀 나이에 나한테 붙들려 담요에 엎드려 글씨 쓰느라 고생들 했다"고 웃었다.

서울대 외교학과 신욱희 교수는 "이수홍 선생님은 내 평생 가장 기억에 남는 은사님"이라며 "평생을 평교사로 재직하시며 학생을 가르치는 일에 온 힘을 쏟으시던 선생님의 모습은 지금까지 내 삶의 모범"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나는 너희들이 나이 60이 될 때까지 오늘 같은 마음으로 즐겁고 건강하게 살 것"이라며 "그때는 수염이 더 자라 있을지도 모른다"며 웃었다.

이씨는 서울 영훈초등학교에서 평교사로 31년6개월을 봉직했으며 1999년에 정년퇴임하기까지 대한민국 서예대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 한국서예협회 부이사장을 지냈다. 이번 작품전에는 모두 70여점의 한글 서예 작품이 전시된다.

전지원기자 podrag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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