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흐르는 한자 512]七縱七擒(칠종칠금)

  • 입력 2002년 12월 22일 17시 30분


縱-놓을 종擒-잡을 금 忍-참을 인

廬-오두막 려碎-부서질 쇄 蜚-때까치 비

七縱七擒(칠종칠금)이라면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풀어준다’는 뜻으로 상대를 마음대로 요리하는 것을 뜻한다. 또 忍耐(인내)를 가지고 상대가 숙여 들어오기를 기다린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蜀主(촉주) 劉備(유비)가 몸져눕게 되었다. 병세가 날로 악화되자 劉備는 成都(성도)에 있던 諸葛亮(제갈량)을 급히 永安(영안)으로 불러들였다.

“그대의 재능은 曹丕(조비·조조의 아들, 魏文帝로 魏를 세움)의 열 배요. 우리 蜀나라를 바로 세우시오. 劉禪(유선·곧 유비의 아들)은 아둔하여… 녀석을 輔弼(보필)할 수 있거든 충실히 輔弼하시오. 하지만 만약 그럴 수가 없다고 판단되면 卿(경)이 대신 蜀을 맡아주시오.”

諸葛亮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사실 유명한 劉備의 三顧草廬(삼고초려)로 諸葛亮은 身命(신명)을 바쳐 劉備의 蜀나라를 돕겠다고 맹세했던 사이가 아닌가. 諸葛亮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신은 단지 粉骨碎身(분골쇄신) 폐하를 輔弼하다가 죽을 따름입니다.”

마침내 劉備가 죽자 諸葛亮은 劉禪을 전력 輔弼하게 된다. 그 때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가장 큰 두통거리는 서남방의 오랑캐였다. 철천지원수 魏(위)나라를 쳐서 하루 빨리 劉備의 유언을 받들어야 했던 諸葛亮은 내란부터 수습해야 했다. 하지만 군대를 동원한다는 것은 무리가 따를 것 같았다. 그래서 그가 궁리한 것이 離間策(이간책)이었다.

諸葛亮은 적진에 流言蜚語(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과연 반란군은 自中之亂(자중지란)을 일으켜 서로 살륙을 일삼았다. 제갈량은 孟獲을 생포했다. 하지만 그가 오랑캐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죽이는 것이 能事(능사)는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삼국지에 보면 이에 관한 諸葛亮과 馬謖(마속)의 대화가 나온다. 잠깐 인용해 보자.

‘치는 것은 간단합니다. 하지만 用兵(용병)의 도리는 최상이 民心(민심)을 공략하는 것이며 그 다음이 城郭(성곽)을 함락시키는 것입니다. 곧 심리전이 최상책이요 군사전은 하책일 따름입니다. 원컨대 승상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정복하십시오.’

諸葛亮은 孟獲을 풀어주었다. 하지만 孟獲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諸葛亮은 지략을 이용하여 孟獲을 사로잡고는 풀어주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하기를 일곱 번, 마침내 孟獲은 心服(심복·마음속으로 복종함)하여 부하가 되기를 자청하였다.

鄭 錫 元 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sw478@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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