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유홍준/박수근미술관을 보러 갑시다

  • 입력 2002년 10월 11일 18시 34분


강원 양구군 양구읍 정림리. 대암산 사명산 봉화산으로 둘러싸인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산간고을에 ‘박수근 미술관’이 세워져 25일 개관식을 갖는다. 앞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지방에 흔히 있는 의례적이고 촌스러운 ‘관제(官製)’ 기념관이 하나 생긴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일부 언론에서 ‘박수근 미술관’에 유화가 1점도 없다며 냉소적으로 보도한 바 있어 아무런 볼거리가 없는 시골 문화시설쯤으로 치부해버린 이도 있을 것 같다.

▼겉과 속 알찬 ´모범 기념관´▼

그러나 내가 보증하건대 양구군립 ‘박수근 미술관’은 현재까지 세워진 우리나라 기념관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조직적인 운영체계를 갖춘 지방미술관의 모범이다.

제주 남제주군의 추사 김정희기념관, 충남 서산시의 현동자 안견기념관, 경기 남양주시의 다산 정약용기념관, 강원 강릉시 오죽헌의 신사임당기념관, 경기 파주시의 율곡 이이기념관…. 지금까지 각 지방 연고지에 세워진 문화예술인들의 기념관을 가보면 우리나라가 문화적으로 얼마나 후진국인가 절감할 수 있을 정도로 엉터리도 그런 엉터리가 없다. 건물만 덩그러니, 그것도 전형적인 관제 ‘공무원표’로 해놓고 진품은 고사하고 복제품 하나 제대로 된 것 없이 설명판조차 불성실하고 부정확한 것을 보면 민망스러움을 넘어 도망이라도 치고 싶을 심정이다.

요즘 지자제 실시 이후 각 지방의 정체성을 찾겠다고 이런 유의 기념관 설립이 곳곳에서 추진되고 있는데 그 발상과 예산은 건물 짓는 것만 염두에 둘 뿐 기념관을 구성할 내용이나 운용방안을 내다보고 하는 사업은 거의 없다. 문화란 하드웨어의 모방이 아니라 소프트웨어의 창출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아직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몇 해 전 마침 지방자체단체장들과 자리를 함께 했을 때 나는 시장 군수들에게 분통을 터뜨리며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은 적이 있었다. 이때 충남 금산군의 김행기 군수는 “아직 우리나라에 좋은 모델이 없어서 관행대로 좇아가는 실정”이라고 지방행정 경험을 털어놓으며 “어디에 모범사례만 생기면 모두들 따라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양구군립 ‘박수근 미술관’은 바로 그런 시대적 요청에 응한 모범적 지방미술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나는 기대하고 있다.

박수근 생가터에 세워진 이 미술관은 30평의 상설기념관과 60평의 기획전시실로 구성되어 기념관과 미술관 두 기능을 모두 갖추고 있다. 유족을 비롯해 애호가 독지가들이 작품과 유품을 기증해 이미 스케치 50여점, 목판화 17점, 수채화 10점, 삽화스크랩북 등 박수근에 대한 기본자료들을 충실하게 소장 전시하게 되었다.

양구군은 예산을 들여 그의 유명한 그림동화 ‘낙랑공주와 호동왕자’라는 고가품을 매입해 이번 개관전에 선보일 것이다. 유화는 아직 구입하지 못했지만 개관기념전에는 ‘나무와 여인’을 비롯해 10점이 출품된다. 뿐만 아니라 이미 72명의 현역 화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기증해 지방미술관의 수장고로는 넉넉한 편이다. 그리고 이미 전문직 큐레이터도 채용해 일하고 있다.

건물로 말할 것 같으면 건축가 이종호씨가 설계해 지금 열리고 있는 ‘베니스 비엔날레’에 한국 현대건축의 대표작 중 하나로 초대될 정도로 높은 평을 받고 있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산과 군부대밖에 없을 것 같은 양구에 이처럼 전에 없이 아담하고 훌륭한 미술관이 서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위대한 우리의 화가 박수근(1914∼1965)의 후덕(厚德)이라는 생각이 든다. ‘박수근 미술관’을 만든다니까 많은 사람이 기꺼이 동참했던 것이다.

▼成敗는 ´문화 소비자´ 발길에▼

그러나 ‘박수근 미술관’은 양구군이 전적으로 박수근선양사업추진위원회(위원장 정탁영 서울대 미대 교수)에 위촉해 미술계 전문가들에 의해 추진된 결과 이처럼 좋은 결실을 본 것이다. 그 점에서 임경순 양구군수는 문화행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모범을 보였다.

이제 양구군립 ‘박수근 미술관’을 위해 우리들이 무엇인가를 해야 할 차례이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문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번 찾아가 주는 일이다. 문화는 생산자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창출해낸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얼마만큼 찾아가 주느냐에 ‘박수근 미술관’의 성패가 달린 셈이다.

유홍준 명지대 문화예술대학원장·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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