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시인 윤동주, 신사머리 왜 삭발했을까

  • 입력 2002년 9월 11일 18시 24분


시인 윤동주(尹東柱·1917∼1945)는 왜 머리를 삭발했을까.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마친 윤동주의 졸업사진을 보면, 그는 당시 ‘신사머리’라고 불렸던 머리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1942년 7월, 일본 릿교(立敎)대학에서 첫 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한 윤동주는 머리를 빡빡 깎은 모습이다.

최근 한 일본 여성이 그 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윤동주의 릿교대 시절에 대한 자료를 찾아내면서 그의 삭발이유가 처음으로 밝혀졌다. 지난달 31일 서울 장충동 한국현대문학관에서 열렸던 ‘윤동주의 시를 읽는다·2002년 한일 독자교류의 모임’에 참석했던 ‘윤동주의 고향을 찾는 모임(동경)’의 회원인 야나기하라 테츠코(楊原泰子)씨.

윤동주의 시에 깊이 매료돼 있던 그는 1988년 소설가 송우혜씨가 펴낸 ‘윤동주 평전’(세계사)의 일본어판(1991)에서 릿교대학을 다니던 무렵, 윤동주의 머리 모양에 대해 언급한 부분을 봤다. 같은 대학 출신이었던 그는 1942년 릿교대학신문을 샅샅이 뒤졌고 4월초 발행된 신문에서 ‘4월 중순, 학생 단발령 실시’라는 기사를 발견했다. 윤동주는 전시상황에서 학교측이 내린 단발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머리를 깎아야 했던 것.

테츠코씨는 당시의 자료를 정리한 ‘윤동주의 릿교대학 시대’라는 글을 ‘한일 독자교류 모임’에서 만난 송우혜씨에게 건네줬다. 이 자료에 따르면, 1942년 대동아전쟁으로 전시체제 아래 있었던 릿교대학에는 군사 훈련을 위해 육군 대좌(지금의 대령)가 부임해 학생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키는 한편 일본의 신도(神道)를 강요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윤동주는 이를 견디다 못해 도시샤(同志社)대학으로 학교를 옮긴 것은 아니었을까.

윤동주가 릿교대학이 있던 동경에 머물렀던 시간은 4개월 정도로 길지 않았다. 한 학기를 보내고 바로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로 옮겼기 때문. 그러나 ‘시인 윤동주’에게 있어 동경은 큰 의미를 지닌 곳이다.

송우혜씨는 “옥사할 때까지 만 3년간 일본에서 살았던 윤동주가 일본땅에서 쓴 시 중에 현재 남아있는 작품은 불과 다섯 편 뿐인데, 윤동주는 이 시를 모두 동경에서 썼다”고 밝혔다. 또 “윤동주의 시는 그의 생활과 직결돼 일기와도 같다. 당시 그가 처했던 상황에 대한

정보는 윤동주의 시를 연구하기 위한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말했다.

일본의 도쿄 후쿠오카 교토에서는 윤동주 관련 모임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으며 매년 윤동주의 기일에 함께 모여 헌화식을 갖기도 한다. ‘한일 독자교류의 모임’에 참석했던 아이자와 가끄(愛澤革)씨는 “일본사람에게는 윤동주의 시를 읽는 일이 매우 복합적인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 맑은 운율로 의연하게 일어서 다가오는 시를 모국어로 쓰고 죽은 한국의 젊은 시인, 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이 시인의 삶을 27년으로 끝나게 한 일본의 과거를 되새기게 하는 일”이라고 털어 놓았다.

1997년부터 일본 후쿠오카의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 동경의 ‘윤동주의 고향을 찾는 모임’ 등을 후원하고 있는 동서문화사 전숙희 대표는 “윤동주야말로 모든 면에서 한국인을 비롯한 전세계인이 사랑할만한 시인”이라며 “일본인들이 얼마나 진지하게, 또 끊임없이 윤동주를 연구하고 있는지 모른다. 오히려 우리가 부끄럽다”고 말했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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