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테러 그후1년]美대중문화, "우리는 하나"강조 드라마 부활

  • 입력 2002년 9월 10일 18시 32분


대중문화는 동시대 대중의 심리와 취향을 읽을 수 있는 일종의 스냅사진이다. 9·11 테러 사태는 미국의 영화 방송 등 대중문화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대중문화에 대한 소비 패턴의 변화를 통해 9·11 테러 사태 이후 위기에 처한 미국인들의 무의식적 지향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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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숙한 것을 갈망한다

9·11 직후 치킨 수프 등 미국인들이 어릴 때 집에서 즐겨 먹던 이른바 ‘콤포트 푸드(Comfort Food)’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듯이, 대중문화에서도 편안하고 친숙한 이야기들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다. 테러 사태 직후 케이블 채널 ‘TV랜드’에서 재방송하던 ‘왈가닥 루시’와 같은 과거의 인기 쇼들의 시청률은 76% 상승한 반면, 케이블 채널 ‘UPN’의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프로레슬링의 시청률은 12∼30% 하락한 것이 그 한 예.

이번 여름 시즌의 TV 프로그램 편성에서도 이런 경향은 그대로 이어졌다. 테러 사태 이전에 인기를 끌었던 TV드라마의 캐릭터는 흑과 백, 선과 악이 불분명한 회색지대형 캐릭터들이 많았다.

HBO의 인기 TV시리즈 ‘소프라노’의 주인공인 갈등하는 마피아 보스와 같은 인물이 그런 경우. 테러 사태 이후에는 이런 캐릭터들은 자취를 감추고 코미디에서 조차 도덕적 의무를 자각하며 가족의 가치를 강조하는 캐릭터들이 TV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NBC는 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아메리칸 드림’을, ABC는 ‘해피 아워’로 이름붙인 저녁 8∼9시 시간대에 가족 코미디 등을 집중 편성했다. CBS의 ‘CSI’ ‘모두가 레이몬드를 사랑해’, NBC의 ‘프렌즈’ ‘법과 질서’ 등 재탕,삼탕된 프로그램이 18∼49세의 시청자들 사이에서 ‘베스트 10’에 든 것도 테러 이후의 변화다. 독창적 스토리가 시청자를 사로잡는다는 것은 옛말. 위기의 시대, 사람들은 친숙한 것을 갈망한다.

●극장에 사람들이 몰린다

9·11 테러 사태 직후 사람들이 공공장소를 기피해 극장이 타격을 입을 거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으나 정반대의 결과가 나타났다. 올 들어 8월까지 영화 흥행수입이 이미 기록경신의 시기인 2001년에 비해서도 20%가 늘어난 것.

미국 영화사가들은 9·11 이후의 영화 붐이 1940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와 유사하다는 점을 주목한다. 1940년에서 43년까지 영화 입장료가 21% 상승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관람인구는 40% 늘어났다.

뉴욕시립대 조지 커스턴교수는 “위기의 시기에 사람들은 도피가 아니라 안심하기 위해 영화를 보러간다. 캄캄한 극장 안에서 사람들은 일시적이나마 낯선 이들과 특정한 목표를 공유하며, 연계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극장에서의 영화관람행위는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확인하고 선포하기 위한 일종의 제의적 공동체험”이라고 분석했다.

●판타지에서 위안을 찾는다

9·11 이후 영화의 기록적 흥행을 가능케 했던 견인차는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스파이더 맨’ ‘스타워즈:에피소드2’ 등 판타지 영화들. 1930년대 미국 대공황기에 뮤지컬 영화가 번성했듯, 9·11 이후 사람들은 판타지 영화에서 위로를 구한다.

판타지 영화의 골격은 대개 비슷하고 원형적이다. 고아로 천대받으며 살던 주인공들은 어느 날 세상의 부름을 받고 절대악과 대결하는 여정에 나선다. 이들은 마지못해 소명을 받지만 결국 승리하는 영웅이 된다. 판타지는 모든 현상을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흑백논리로 설명하고 그만큼 보수적이다. 베트남전쟁과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었던 77년에 등장한 ‘스타워즈’ 1편은 ‘은하계 저 먼 곳’을 무대로 영웅의 신화를 창조하며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영웅이 필요한 시기인 9·11 이후에도 판타지 영화는 대중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

9·11 직후 테러를 묘사한 영화들의 개봉을 일시적으로 연기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하지만 올해 5월 ‘썸 오브 올 피어’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테러영화에 대한 거부감은 사라졌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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