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검정 교과서 논란으로 살펴본 우리의 역사 기록

  • 입력 2002년 8월 6일 18시 07분


조선시대 국왕의 일거수 일투족까지 세세하게 기록해 역사서술의 전범으로 평가받고 있는 '승정원 일기'

조선시대 국왕의 일거수 일투족까지 세세하게 기록해 역사서술의 전범으로 평가받고 있는 '승정원 일기'

《일부 근현대사 검인정 교과서의 김대중 정권 치적 홍보로 인한 논란과 함께 역사 서술에 관한 관심이 부각되고 있다.

역사 서술의 기초인 사료(史料)는 어떤 것이 있고 어떻게 후대에 전해져 역사로 서술되는지, 과거에는 어떻게 역사를 서술했고 현재는 어떻게 역사가 기록되고 있는지 알아봤다. 아울러 현대의 사료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누가 어디서 보존하는지, 또 왜곡은 없는지 등을 살펴본다.》

▼역사 편찬의 역사▼

엄격한 의미의 역사는 문자와 함께 시작됐다. 문자는 기록으로 이어지고 기록이 쌓여 역사를 이룬다. 문자 이전을 선사시대라 하고 문자 이후를 역사시대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삼국·통일신라시대=유기(고구려) 서기(백제) 국사(신라) 광개토왕비 진흥왕순수비 신라장적

한반도 역사의 시작은 기원 전후의 철기시대. 이후 3∼4세기 고대국가 발전기를 지나면서 구체적인 역사 기록이 나타난다. 삼국 시대엔 ‘유기’ ‘신집’(고구려) ‘서기’(백제) ‘국사’(신라)등의 역사가 편찬됐고 각종 율령이나 문서, 광개토왕비, 신라 진흥왕순수비 등의 중요한 사료를 남겼다.

고려시대에는 실록과 함께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전시대의 사서를 편찬하면서 본격적인 역사편찬이 시작됐다.

▼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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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엔 세계기록문화사에 빛나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이상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를 남길만큼 역사 편찬이 두드러졌다.

이 사서들은 국왕의 공적인 활동과 사적인 일을 샅샅이 기록해 엄정한 역사 서술의 전범이 되고 있다.

▼지금은 누가 역사를 편찬하는가▼

고려시대=왕조실록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

근대 이전의 역사 편찬은 국가(왕실)가 주도했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역사 편찬은 국가를 넘어 다양한 개인의 역사 서술로 나아가고 있고 ‘정치 경제 사회사’ 못지않게 분야별 ‘일상사’에 대한 연구가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역사 서술은 교육부가 만드는 중고교 교과서와 국사편찬위원회가 간행하는 ‘한국사’. 1973년부터 79년까지 25권의 한국사를 편찬했던 국사편찬위원회는 1991년부터 52권짜리 한국사를 다시 편찬하고 있다. 올 가을 마무리된다.

국사편찬위의 역사기록 하한 시점은 1948년 정부수립이다. 정부수립 뒤의 역사는 편찬 시점이 언제가 될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대략 30년 이후가 될 것으로 국사편찬위원회는 예측하고 있다.

교육부와 국사편찬위원회의 역사 서술을 제외하면 한국사는 대부분 개인이나 사설 연구단체가 펴내고 있다. 이들 역사책은 객관적인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하지만 집필자의 사관(史觀)에 따라 다른 서술의 역사가 나올 수 있다.

박종기 국민대교수(고려사)는 “지배층이 역사를 점유했던 전근대와 달리 현대는 역사 서술의 주체가 시민”이라면서 “조선시대와 다르므로 국가가 역사 서술을 독점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설명했다.

국가 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가 간행하고 있는 한국사도 다양한 시각의 한국사 중 하나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어떠한 사료를 이용하는가▼

조선시대=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조선왕조실록 동국통감

현대 역사가들은 다양한 사료를 다 이용한다. 과거 조선시대사를 서술할 경우라도 기존처럼 왕조실록의 정치사 중심에 그치지 않고 생활 여성 문화 등의 주제별로 서술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 역사 서술에 있어 선택하는 사료의 폭이 확대된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기본적인 사료는 조선총독부 기록물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신문과 잡지가 중요하다. 이는 19세기에 볼 수 없었던 것으로 통치권 차원의 사료 못지않게 사적(私的)인 자료들이 활용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성격인 청와대와 정부의 공식기록물. 아울러 각종 언론 출판물을 비롯해 경제 과학 문화 관련 자료도 사료가 된다.

▼사료는 누가 어떻게 수집해 정리 보관하는가▼

일제강점기=조선상고사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사료 수집의 대표적인 기관으로 정부기록보존소와 국사편찬위원회를 들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일제강점기와 정부수립 전후의 국내외 사료 수집에 역점을 두고 있다. 조선시대 사료는 물론이고 한국독립운동사, 일제 침략사 관련 자료들을 수집해오고 있다. 이들 자료를 발행기관이나 연도별로 분류한 뒤 내용을 정리한다.

국사편찬위원회는 특히 지난해부터 5개년 계획으로 해외에 유출된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이들 사료는 수십년 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개정판 발간에 이용된다.

청와대와 정부 부처의 기록물은 정부기록보존소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다. 이들 사료는 정부수립 이후 최근까지의 기록이다. 그러나 청와대와 정부가 제대로 기록물을 남기지 않고 있는 데다 그나마 정부기록보존소에 넘기지 않고 자의적으로 은닉하거나 파기하는 경우가 있다.

또 각종 연구기관이나 도서관 박물관 등에서도 사적인 사료를 수집해 보관하고 정리 편찬한다. 최근엔 언론사에서도 각종 기사나 출판물 내용, 소장 자료 등을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있다. 신문의 경우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매일매일의 역사’다.

국사편찬위 강영철 편사부장(한국사)은 “현대사회에선 왕 또는 정부 중심의 자료를 연대별로 나열 정리하는 식의 역사서술이 아니라 테마와 자료별로 사료를 취합해 이를 사가(史家)들의 판단에 맡기는 방식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

▼정권 바뀔때마다 휴지로… 정부기록물 관리 ‘구멍’▼

광복 이후=한국사신론 한국사

조선시대 왕의 옆에는 늘상 3명의 사관(史官)이 쫓아다녔다. 둘은 왕의 말씀을 기록하고 다른 한명은 왕의 표정을 기록하는 이였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통치권자 옆에는 사관(史官)이 없다. 조선시대 그 엄정했던 사관의 눈이 실종된 것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집권 5년간 82권 1096건, 김영삼 전 대통령은 111권 1612건의 통치 사료를 남겼다. 보잘 것 없는 양이다. 이중 정부기록보존소로 이관된 것은 각각 불과 34건, 227건으로 상당 부분이 은폐 혹은 파기돼 버렸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재직 시절 일종의 사관인 통치사료비서관을 신설했다. 그의 공적 사적 발언을 자세히 기록하도록 했으나 퇴임 뒤 그 사료를 사저로 옮겨놓았다. 국가적 사료를 개인이 은폐한 것이다.

그렇다보니 정부기록보존소와 청와대 비서실에 있는 역대 대통령 관련 기록은 대통령 결재 문서가 전부다.

정부 기록물도 마찬가지.

해마다 영구보존대상 정부 문서는 약 30만권(권당 200페이지). 이중 정부기록보존소로 이관되는 것은 10%도 안되는 1만∼2만권에 불과하다. 그리고 5년도 넘기지 않고 폐기되는 문서가 80%나 된다는 것이 정부기록보존소측의 추정이다.

정부수립 이후 청와대와 정부 관련 기록은 내용도 허술하고 상당 부분 은폐되거나 폐기됐다. 정승화 전계엄사령관의 체포에 관한 서류가 10년만에 폐기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사학자들은 이에대해 정부수립 이후를 한국사에 있어 통치 관련 사료의 공백기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지적에 따라 ‘공공기관의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이 2000년부터 시행돼 대통령과 청와대 비서실, 경호실 등의 공적 행위의 기록을 의무화했다. 이 법에 따르면 대통령이 결재하거나 보고 받은 기록은 물론 보좌기관이 만들거나 접수한 기록물, 대통령이나 차관급 이상 보좌 기관이 참석하는 정책 회의록, 대통령의 메모 일정표 방문객 대화록 연설문 등도 보존해 정부기록보존소에 이관해야 한다.

그러나 ‘공공기관의 …’은 정부 부처로부터 외면 또는 무시당하고 있다.

청와대의 통치사료비서관은 정치적 독대나 정상 회담시 대변인이 발표하지 않는 내용은 기록에 포함하지 않는다.

다른 정부 부처도 마찬가지다. 2000년 12월26일 산업은행이 최대 10조원 가량의 부실 회사채를 인수해 국민에게 부담을 줄 수 있는 사안을 결정한 회의의 기록이 없다. ‘차관급 이상 참가시 회의록 작성’ 규정을 위반한 것이다.

참여연대 조사에 따르면, 2000년 1월∼2001년 3월 22개 중앙부처의 차관급 이상이 주재한 225개 주요회의 가운데 속기록이 작성된 것은 7개뿐이었다. 명백한 실정법 위반이다.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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