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세~계 최강, 대~한민국"의 심장 '광화문 르네상스'

  • 입력 2002년 6월 27일 15시 55분


광화문은 밖으로 향한 문이다. 경복궁의 정문이되 궁 안을 지키는 ‘수문장’이 아니다. 그 앞에서 뻗어나가는 세종로를 따라 광명천지로 향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소통의 출구다. 조선을 세운 사대부들은 건국의 자부심을 담아 광화문 앞에 너비 58척(18.56m)의 큰 길을 냈다. 고종 40년 세종로 사거리에 전국 국도의 원점인 이정원표(里程元標)를 세운 것은 ‘이곳이 한국의 중심’이라는 선언이었다.

그 광화문이 다시 빛난다. 억눌렸던 땅심이 세종로 사거리(광화문 사거리)를 가득 메웠던 사람들의 쿵쾅거리는 발소리와 함성으로 일어났다. “하늘(天)과 땅(地)의 운이 있어도 그에 더해지는 사람(人)의 힘이 없으면 기운이 승할 수 없다. 수십만명이 온갖 음울한 그림자를 쫓는 빛(光)의 색, 붉은 옷을 입고 지신밟기를 했으니 쇠했던 이 땅의 활력이 다시 흥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조용헌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모순과 이질의 공존, 광화문

유럽방식으로도 남미 스타일로도 잘 해석되지 않는 한국축구의 무서운 파워. 훌리건과도, 과거 공산체제의 군중동원과도 다른 수백만명 한국 거리응원단의 ‘스스로 통제가능한’ 열정. 세계가 주목한 이 놀라운 ‘대한민국 현상’이 3차원의 공간으로 드러나는 곳이 광화문이다.

광화문은 혼재와 중첩의 공간이다. 모순과 이질이 서로 어깨를 기대고 있다.

조선시대 양반 행차를 피하던 백성들이 만들어 놓은 600년 전통의 길, 피마(避馬)ㅅ골의 즐비한 가정식 백반집을 찾고 싶다면 골목 입구의 햄버거집 ‘버거킹’을 표지로 삼아야 한다. 대한민국 행정부의 핵인 정부종합청사가 있는가 하면 싱가포르 투자청, 메릴린치, 매킨지컨설팅 등 건물 주인부터 입주사까지 외국자본이 독점하다시피한 서울파이낸스센터도 있다.

광화문 그 자체가 이질적 시간의 복합체다. 서 있는 자리는 1395년 창건 당시에서 13m쯤 안쪽으로 들어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한글로 현판을 단 ‘광화문’이라는 이름은 1425년 집현전이 바꾼 것(光化門)이다. 원래 이름은 조선의 개국공신이었다가 역적이 된 정도전이 작명한 사정문(四正門). 일제 강점기 경복궁 동문 쪽으로 쫓겨갔다가 6·25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68년 철근과 콘크리트로 다시 지었다.

과거와 현재, 영광과 오욕, 지배와 피지배, 한국과 외국, 식민과 민족자주의 흔적이 공존하는 이 거리의 또다른 특징은 획일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왕복 20차로의 세종로 등 광화문의 대로변은 파리의 샹젤리제를 연상시키는 말쑥한 근대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나 대로 안쪽으로 열 발짝만 들어가도 실타래처럼 얽힌 골목들을 만날 수 있다. 골목마다 다른 이력과 단골을 가진 밥집, 술집, 가게…. 광화문의 골목은 이 공간의 자유와 개성을 담보해 왔다.

“보행자의 동선이 쉽게 파악되는 근대형 대로의 배후에 일사불란한 통제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골목을 갖고 있는 점. 그것이야말로 광화문의 매력이자 가능성이다.”(사회학자 이진경)

● 월드컵의 룰, 광화문의 룰

세종로 중앙의 이순신 장군 동상이 보이는 곳이라면 한국인은 실제 서 있는 곳이 세종로든 종로든 태평로든 으레 자신의 위치를 ‘광화문’이라고 말한다.

66년 지하보도가 생긴 이래 사람들이 광화문에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땅 밑이었다. 세종로 사거리에 횡단보도가 다시 등장한 것은 2000년. 햇볕을 쪼이며 북악산에서 불어오는 북서풍을 느끼며 길을 걷는 사람이 늘기 시작했다. 80년부터 차츰 늘어난 세종로 사거리의 작은 휴식공간들이 늘어난 보행자들을 맞았다, 세종문화회관의 계단과 도로로부터 들여지은 교보생명빌딩 광화문빌딩 동아미디어센터 서울파이낸스빌딩 앞 공간 등은 ‘흘러가던’ 보행자들의 정거지점이 됐다. 세종로 사거리의 전광판들이 큰 스포츠경기라도 비추는 날이면 이 휴식공간들은 군중의 ‘작은 광장’으로 변모했다. 사람들은 카 퍼레이드가 벌어지던 엄숙한 ‘나랏길’을 자신의 작은 즐거움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월드컵을 통해 광장은 핵분열했다. 차들이 질주하던 세종로 사거리 일대를 사람이 걷는 ‘광화문 광장’으로 아예 용도변경했다.

누구도 수십만의 인파를 모으지 않았다. 현장을 통제하는 질서요원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경찰이 라인을 정하면 그 안 빈 곳에 차례로 자리를 잡았다. 다 함께 외치는 “대∼한민국”이었지만 60대는 광복과 전쟁의 시절을, 40대와 50대는 허리띠를 졸라맸던 경제성장기를, 30대는 87년 6·10의 민주화함성을, 20대는 외환위기의 격랑을, 10대는 어떤 시련에도 주눅들어 본 적 없는 “세계최강 대한민국”을 외쳤다. 이 서로 다른 “대∼한민국”이 시간의 지층이 켜켜이 쌓인 광화문에 한 목소리로 울려 퍼졌다. 위로부터 강제되는 국가 아이덴터티 ‘대한민국’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대한민국의 탄생이었다.

광화문 광장의 시민들은 배타적이지 않았다. 이번 월드컵에서 미국과 1-1 무승부로 비긴 날에도 세종로의 미국대사관은 평온했다. ‘네덜란드국기 1500원, 태극기 900원’이라고 써붙인 행상 사이로 앞면에는 ‘Be the Reds’, 뒷면에는 ‘7번 베컴’(잉글랜드팀)을 새긴 붉은 티셔츠를 입은 응원객들이 걸어다녔다. 유럽스타일의 경적소리가 나는 장난감 나팔과 한국 전통의 소고가 함께 응원물품으로 등장했다. 붉은 물결 속에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붉은 조끼와 피켓의 자리까지 마련돼 있었다.

광주 금남로, 대구 범어네거리, 부산 해운대 등에도 각각 수십만의 인파가 몰려 광화문처럼 거리응원전에 나섰다. 단순한 구호와 응원가는 누구나 따라 부르기 쉬웠다. 현대과학의 프랙탈(fractal) 이론처럼,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광주 대구 부산은 서울을 닮아 있었다. 그러나 광화문이 금남로와 해운대를 지배하지 않았다. 광주 대구 대전 울산 어디서 경기를 하더라도 광화문의 함성은 공명을 이루었다. 지방과 서울의 차이가 ‘월드컵 광화문’에서는 해소됐다.

● “세∼계최강, 대∼한민국”의 심장 광화문

한국팀에 대한 경의는 열두번째 선수인 한국응원단에도 돌아가야 한다. 광화문의 붉은 물결은 축구 종주국 훌리건의 출구를 찾지 못한 분노가 아닌 새로운 응원문화를 보여주었다. 패자에게 “괜찮아, 괜찮아”라는 격려를, 승자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냈던 광화문은 경기 다음날 아침이면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으로 돌아가 있었다.

2002년 월드컵은 어제의 아웃사이더가 오늘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러나 그것은 자리 바꾸기의 의미가 아니다. 힘이 지배해 온 질서 그 자체의 전복이다.

세대와 계층, 성, 지역, 문화, 국적이 다른 사람들이 ‘열정’을 공유했던 광화문. 서구와 비서구를 가르고, 문명 대 문명이 충돌할 것이라는 불안에 사로잡힌 서구사회가 9·11 테러의 혼돈에서 여전히 헤어나오지 못하는 시점에 개최된 21세기 첫 월드컵.

광화문은 ‘상생(相生)’의 다른 가능성을 전 세계에 보여줬다. 과거와 현재, 영광과 오욕, 전통과 첨단, 지역성과 세계화의 어느 한쪽이 다른 하나를 지워 없애거나 해결하지 못하고도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줬다.

2002년 6월, 광화문은 어디에 있는가.

그곳은 더 이상 지상의 공간만이 아니다. 광화문은 젊은 대한민국의 혼이다. 세계를 향해 우리가 내뿜은 희망의 외침이다.

정은령 기자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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