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최강' 송파구 여성축구단

  • 입력 2001년 4월 24일 19시 03분


◇위풍당당 '아줌마 전사들'-"그라운드가 좁다"

“노경이 언니, 가운데가 비었어. 드리블, 드리블….” “경애야, 나 여기 있어. 이쪽으로 패스.”

20일 오전 서울 송파구 방이동 성내천 둔치의 축구경기장. 파란색 유니폼 차림의 ‘여전사’ 20여명이 휘슬에 맞춰 봄바람을 가르며 슈팅 연습에 몰두하고 있다. 수비 연습을 할 때는 프로축구 못지않은 격렬한 태클장면도 보인다.

‘아줌마축구’ 전국 최강을 자랑하는 송파구 여성축구단원들의 연습현장이다. 대부분이 전업주부로 평균연령 39세. 자녀수 1∼3명에 입단 전 축구경력이 전혀 없는 ‘순수 아마추어’로 구성됐다. 우리 주변의 그야말로 평범한 ‘아줌마’들로 구성된 선수들은 그러나 경기장에 들어서는 순간 프로들 못지않은 승부욕을 불태우는 ‘아마조네스’의 여전사가 된다.

98년 창단해 3년 만에 여성축구동호인들 사이에서 국내 ‘최강’으로 부상한 송파여성축구단은 방이동의 전용축구장에 모여 매주 두차례씩 강도 높은 훈련을 받고 있다.

올해 전적 7전 6승 1무. 하이라이트는 지난달 가수 김흥국씨가 주관한 ‘파필리오(호랑나비)배 전국주부축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

아마추어지만 송파구 소속의 공식단체인 만큼 정식 감독과 코치가 있으며 구청으로부터 유니폼에서부터 구청 구내식당 이용권에 이르기까지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평균연령 39세…올 7전6승1무

축구단의 전신은 구청에서 모집한 주부축구교실. 선수모집시 150여명이나 몰려들었지만 고된 훈련을 못 견디고 대부분이 떨어져나간 뒤 본격적으로 축구를 할 ‘의지와 체력’이 따라주는 50여명만이 ‘잔류’했다. 30, 40대의 ‘강단’ 있는 가정주부들이었다.

‘송파구의 히딩크’인 김현철 감독은 “처음엔 우습게 봤는데 지난 3년간 쌓은 기초체력과 기술이 놀랍게 향상됐다”면서 “특히 주부선수들의 프로선수들 못지 않은 투지가 최대의 무기”라고 말했다. 추위가 심했던 올겨울을 비롯해 아무리 눈비가 심해도 연습 한번 거르지 않았다. 매주 한차례씩 하는 정기연습은 단원들의 ‘강력한’ 요구로 지난해부터 매주 두차례로 늘려야 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강한 ‘여전사’들로 만들었을까.

창단멤버 가운데 하나인 배화자씨(46). “처음엔 수영이나 에어로빅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고 덤벼든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죠. 그런데 일단 해보니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축구경기에서 상대방팀에 한골차로 졌을 때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기분을 잘 모를 거예요.”

‘언니들’에 비해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이순덕씨(31)는 “경기를 전후해서는 꿈에서도 축구공과 골대가 나타난다”고 말할 정도.

매번 경기출전을 앞두고는 40여명의 선수단 가운데 감독의 냉철한 기준에 따라 주전선수가 선발된다. 주전에 들기 위한 단원들간에 보이지 않는 경쟁도 ‘근성’을 북돋운다.

▽주전경쟁 치열…"팬도 있어요"

처음엔 ‘여자들이 축구를 하면 얼마나 하겠느냐’며 반신반의했던 남편들은 이제는 모두 열성 후원자가 됐다.

남편들은 아내가 지방에 원정경기갈 때면 ‘애들 잘 볼 테니 걱정말고 꼭 이기고 돌아오라’며 성원해주곤 한다. 요즘엔 동네 조기축구회 아저씨들 가운데도 열성팬이 생겨 시합 때면 공을 사들고 올 정도다.

주위의 관심이 높아지다 보니 한차례 경기를 치를 때마다 ‘월드컵 본선 진출전’을 치르는 것처럼 승부에 부담감을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 하지만 선수들은 “고된 훈련 끝에 얻어낸 승리의 쾌감과 동료애가 일상생활에서도 자신감으로 나타나 활기 있는 삶을 만들어준다”며 축구 예찬을 멈출 줄 몰랐다.

◇주장 김정희씨 -"여자들 승부시샘 남자 뺨쳐요"

“축구를 하면서 한동안 잊었던 내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50여명의 선수들을 대표해 팀을 이끌고 있는 주장 김정희씨(40·사진). 그녀는 축구를 통해 선수들이 얻게 된 가장 소중한 선물이 그동안 잊었던 ‘이름 석자’라고 말했다.

“경기장에 서면 누구도 나를 ‘아무개 엄마’가 아닌 ‘김정희’라는 이름 석자로 불러주거든요.”

주부들에겐 당당히 자기 이름 석자를 등에 붙이고 경기장에 서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팀원들이 승부에 무관심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여자들의 ‘승부 시샘’은 남자를 능가한다.

“큰 시합 가서 지고 올 때면 버스가 온통 눈물바다가 되죠. 이럴 때 동생과 언니들의 등을 다독이며 격려하는 것도 주장인 저의 몫이고요.”

동료애가 쌓이면서 스포츠의 세계를 조금씩 알아가는 묘미도 쉽게 축구를 그만둘 수 없게 만드는 이유다.

김씨 등은 5월에 열릴 송파구청장배 전국여성축구대회를 앞두고 강훈련을 하고 있다. 처음 창단될 때만 해도 함께 시합할 팀을 구하기조차 힘들었지만 그 후 마포 양천 도봉 구로 등에 주부축구단이 속속 생겨나면서 ‘라이벌’들도 그만큼 늘어났다. 1990년 평양여성축구팀과의 친선경기를 위해 급조하다시피 최초의 여성축구단이 만들어진 것이 국내 여성축구의 시발. 여성축구에 대한 민 관의 지원이 늘고 아시아경기와 올림픽에도 공식종목으로 지정되면서 팀 창단이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박윤철기자>yc9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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